속도에 연연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행이니까

스쳐 가는 인연들이 남기는 것

by 공진구
3번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었어야 했는데..

여행 6일째 되는 아침,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코인세탁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에는 개인작업을 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2단으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앙에는 카드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만 세탁물이 아닌 건조기에 빨래를 넣고 작동시켜 버렸다. 결국 세탁기는 아무것도 없이 세제만 마구 뿌리며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유니폼을 입고 계신 할머니께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고장 나는 건 아니죠?”

“아니야, 괜찮아. 덕분에 세탁기가 아주 깨끗해지겠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세탁기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고 해서 고장 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하얗게 멈춰버리고 말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세탁물을 꺼내 다른 세탁기에 옮겨 담고 9달러를 다시 결제했다. 의자에 앉아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중, 어느새 30분이 지나 세탁이 끝났다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그때 크리스티가 내가 실수로 돌린 세탁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네가 돌린 거야?”

“응 내가 실수한 거야. 돌려도 돼.”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고마워.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

“나는 한국인이야 너는?”

찜닭 사진을 보여주는 크리스티

크리스티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서울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마포구에서 먹은 찜닭과 삼겹살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음식 이름이 뭐야? 너무 맛있어서 또 먹고 싶어”

“찜닭이야! 나 찜닭 엄청 좋아해. 호주에 있으니까 나도 찜닭이 그리워”


크리스티는 태국에서 왔으며 호주에는 공부하러 왔다고 했다. 나는 아직 태국을 가본 적은 없지만 팟타이를 너무 좋아해서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왜? 팟타이가 그렇게 잘 맞았어?”

“내가 시드니에서 처음 팟타이를 먹어봤는데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어. “

“주변에 맛있는 태국 식당 많은데 알려줄까?”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치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녀가 추천해 준 식당을 구글 지도에 저장했다. 크리스티는 학교 시험기간이라 함께 태국 음식을 먹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했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을 주고받은 뒤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빨랫감을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놓고 곧바로 시드니 근교의 팜비치로 향했다.


시드니에서 팜비치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약 2시간 30분이 걸린다. 시드니의 숨겨진 여행지를 찾던 중 우연히 팜비치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보게 되었다. 두 개의 바다가 맞닿은 풍경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Wynyard 역에서 버스를 타고 첫 번째 환승 지점에 내렸다. 목이 말라 정류장 앞 마트에 들어가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냈다. 카드로 계산하려는데 네팔 직원이 영어로 무언가 말씀하시길래 직감적으로 “소액 결제는 현금만 되는구나”싶었다. 현금이 없다고 말한 뒤 물을 제자리에 두려는데 뒤에서 “그냥 가져가도 괜찮아요”목소리가 들려왔다.

네팔 직원께 공짜로 받은 물.

나는 어리둥절한 채 왜 공짜로 주느냐고, 대신 미국 달러라도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네팔 직원은 필요 없다며 편하게 가져가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친절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선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 뒤 가게를 나섰다.


잠시 후 버스를 타고 1시간이 지나자 차 안에는 나와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만 남아 있었다. 그녀 역시 팜비치에서 내리는 것 같았다. 종점에 내리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탁 트인 풍경이 펼쳐졌다. 길가에는 작은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고, 해안가에는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푸른 잔디밭이 이어진 산책로가 펼쳐져 있었다. 사진 속 풍경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바렌조이 전망대까지는 약 20분 정도 하이킹을 해야 한다.

산 입구에서 숨을 가다듬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백인 아저씨가 헐떡이며 내려와 “정상까지 오르려면 산소마스크가 필요할 거야”걱정 섞인 조언을 해주셨다. 그의 말에 잠시 겁이 났지만 속으로는 ‘에이, 20분쯤이야~’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자신만만했던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산을 오르는 동안 햇빛을 가려줄 그늘이 없어 눈이 따가웠고 물을 계속 마셔도 땀은 조금도 멎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급하게 정상에 오를 필요가 있을까? 빠르게 도착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그동안 사회가 정한 속도에 맞춰 살아왔으니, 적어도 이번 여행만큼은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가만히 서서 눈을 감았다. 처음엔 거친 숨소리만 들리더니, 이내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와 파도가 부딪치는 부드러운 자연의 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아, 눈앞의 목적지만 바라보다 보면 이런 소중한 순간을 놓치게 되는구나.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준비가 되면 다시 오르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다시 봐도 비현실적이다

바렌조이 전망대에 도착해 사진 속 풍경을 실제로 마주하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스쳤다. 두 개의 바다가 나란히 원을 그리며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작지만 선명한 초록빛 언덕과 해안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이 아름다운 곳에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언덕 끝자락에 조심스레 앉으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괜히 신이 나서 다리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삼각대를 세워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쉬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20분쯤 지났을까.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아까 버스에서 봤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사토미였다. 일본에서 돈을 벌기 위해 호주에 왔고, 현재는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 팜비치를 구경하러 나왔다고 했다.


”나 후쿠오카, 오키나와, 도쿄, 오사카로 여행 가봤어 “

”정말? 나도 서울 여행 갔었는데 (사진을 보여주며) 쭈꾸미 볶음 짱이더라! “

”너 호주에서 시드니에만 있어? 다른 곳은 안 가? “

”나 내일 기차 타고 멜버른으로 넘어가. “

”혹시 브런치 메뉴 좋아하면 내가 멜버른에 맛있는 집 많이 아는데 추천해 줄까? “


사토미는 구글 지도를 열어 멜버른의 맛있는 크루아상과 샌드위치 가게를 추천해 줬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로 이어졌고, 사토미가 마라탕을 먹을 거라고 하자 나는 괜찮다면 함께 먹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번에 나온 귀멸의 칼날 극장판 봤어? “

”한국에서 러브라이브 아이스크림 챌린지가 엄청 유행이야! “

”바운디랑 고마츠 나나 좋아해? “


”내 친구들은 세븐틴에 완전 빠졌어 “

”나 최근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 봤는데 꽤 재밌더라! “

”한국 음식 중에서 김치가 제일 그리워 “


서로의 문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안은 손님들로 붐벼 시끄러웠고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빈 테이블 위에는 누군가 먹고 간 그릇이 남아 있었고, 재료 선택지는 한국보다 훨씬 다양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많이 담지 않은 것 같은데 계산대에서 무게를 재보니 27,000원이 나왔다.

27,000원 마라탕

나는 면과 고기를 중심으로, 사토미는 채소 위주로 담아서 그런지 가격 차이가 난 듯했다. 마라탕은 탱글탱글한 면과 쫀득한 분모자가 어우러져 맛있었지만, 밥은 차갑고 덩어리로 뭉쳐져 있어 젓가락으로 집을 때마다 밥알이 흐물흐물 무너져 아쉬웠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식당 밖으로 나왔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함께 저녁 먹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사토미는 환하게 웃으며 ”나도 즐거웠어! 다음에 한국 가면 꼭 연락할테니 너도 도쿄에 오면 꼭 연락 줘 “라고 말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낯선 사람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이 맞으면 함께 식사하게 되는 일이종종 있다. 국적도, 언어도,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그 다름을 마주할 때마다 오히려 흥미로움을 느낀다. 잠깐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지만 여행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유독 특별하게 다가온다. 아마 그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진심이 전해지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 찰나의 인연들이 언젠가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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