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들
멜버른행 기차를 타기 위해 시드니 센트럴 역에 도착했다. 처음엔 비행기를 알아봤지만, 위탁 수하물을 추가하니 요금이 15만 원을 훌쩍 넘어 결제하기가 망설였다. 반면 기차는 수하물까지 포함해 89,000원으로 훨씬 합리적이었다. 시드니에서 멜버른까지 약 12시간이 걸리는 만큼 하루 숙박비를 아낄 겸 20시 42분 출발 열차를 예약했다.
출발 두 시간 전 수하물을 부치기 위해 미리 역에 도착했다. 사무실 안에는 기차 탑승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앞에는 주황색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직원 두 분이 서 있었다. 연세는 60~70대쯤 되어 보였는데, 두 분 모두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셨다. 그중 한 분이 18kg이 넘는 내 배낭에 수하물 택을 붙인 뒤, 컨베이어 벨트 위로 힘껏 들어 올려 주었다.
호주에서는 관공서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창구 너머에서 느긋하지만 정확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놓인다. 느리지만 흐트러짐 없는 손길, 그리고 세월이 묻어나는 태도 속에서 묘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호주에 머물면서 일이라는 게 꼭 젊고 빠른 사람의 몫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의 느린 걸음과 차분한 말투 속에서 일을 대하는 품격이 어떤 것인지 배운 것 같다.
시드니에서 버스를 탈 때마다 항상 기사님께 “Hi, good day!”하고 인사를 건네면, “Thank you. Have a good day!”라며 다정하게 받아주셨다. 그 반응이 너무 좋아서 버스에서 내릴 때면 일부러 기사님에게 다가가 큰소리로 “Thank you so much!”라고 인사하곤 했다. 그러면 기사님은 늘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반갑게 흔들어주셨다.
공원에서 수줍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찹쌀떡처럼 말랑한 볼살의 귀여운 아기, 본다이 비치에서 혀를 내밀며 광활한 잔디밭을 힘껏 달리던 강아지, 맨리 비치로 향하는 페리에서 황홀한 표정을 짓던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꼬마, 해안가에서‘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Golden을 따라 부르는 유치원생들, 뉴욕을 닮은 서큘러 퀘이에서 헤드셋으로 Sombr의 I wish I knew how to quit you를 들었던 순간,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윤슬이 반짝이던 바다 위에서 바라본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
마트에서 물을 사려다 현금이 없어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하자 돈을 받지 않겠다며 그냥 가져가라던 네팔인 직원,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자 “너 여기서 내려야 해!”하고 손짓해 준 호주 할아버지, 호스텔에서 만난 마크와 아노스, 코인 세탁방에서 친해진 크리스티, 그리고 우연히 팜비치에서 만나 마라탕까지 함께 먹었던 사토미. 여기에 투어에서 혼자 온 나를 자연스럽게 챙겨주셨던 민후 형과 대균이 형까지.
여행 경비가 부족해 수압이 약한 샤워실에서 15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불이 꺼지고 와이파이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싸구려 호스텔에서 묵었지만, 그럼에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유를 느끼게 해 준 시드니. 널 진심으로 사랑해.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야간 기차에서 잠시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다 피곤해져, 목베개를 낀 채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떠 화장실로 향했는데, 기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좁은 공간에서 졸린 눈으로 양치하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쳐 괜히 웃음이 났다. 데이터는 터지지 않았고 휴대폰 위치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자리에 앉아 미리 내려받은 책을 읽거나,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헤드셋으로 음악을 들었다. 주변은 어둡고 사람들은 모두 피곤한 듯 깊이 잠들어 있었다. 기차는 중간중간 역에 멈춰 새로운 승객을 태운 뒤 다시 어둠 속을 달려갔다.
08시가 되자 기장이 멜버른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내보냈다. 불이 켜지며 어두웠던 기내가 밝아지자, 사람들은 곳곳에서 신음을 내며 굳은 몸을 풀었다. 창밖으로 처음 본 멜버른은 흐린 날씨 탓에 유리와 금속으로 된 고층 건물들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기차가 서던 크로스 역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곧바로 수하물을 꺼내 옮기기 시작했다. 플랫폼 위에 커다란 가방들이 줄지어 놓이자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짐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멜버른은 시드니와 달리 컨택리스 교통카드 기능이 지원되지 않아, 역에 비치된 기계에서 마이키 카드를 직접 구입해야 했다. 발급비만 6달러인데 카드를 반납해도 환불되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멜버른 주요 관광지는 무료 트램 존에 포함되어 있어 잠시 발급을 망설였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4만 원을 충전했다.
역 밖으로 나오자 시드니의 시원한 날씨와는 달리 멜버른의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스쳤다. 급히 바람막이를 꺼내 걸친 뒤 트램을 타기 위해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그때 세븐일레븐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정류장 한가운데에는 “anytime 7-eleven time”이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었고, 지붕은 주황·초록·빨강의 익숙한 색 조합으로 칠해져 있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그 편의점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정류장이라는 평범한 공간이 로고 색과 슬로건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특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다.
오전 10시쯤 호스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은 오후 2시부터였지만, 리셉션 직원에게 시드니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고 하자 힘들었겠다며 흔쾌히 얼리 체크인을 해주었다.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하루 종일 씻지 못해 머리는 떡지고,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에서는 냄새가 났다. 깨끗한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니, 묵혀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잠시 한숨 돌린 뒤,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도심에 들어서자 유럽에서나 볼 법한 다양한 트램들이 쉴 새 없이 손님을 태우고 있었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오래된 트램부터 초록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중간형 트램,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최신형 트램까지. 멜버른은 버스보다 트램이 더 많아 보였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교통수단이라 그런지 유난히 눈길이 갔다.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도로에 깊게 박힌 트램 레일을 바라보며 ‘이건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걸까?’ 하고 감탄했다.
멜버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자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기차역인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르네상스풍과 빅토리아 양식이 어우러진 유럽식 건축물로, 정문 위의 작은 시계는 마치 런던의 빅벤을 떠올리게 했다. 역 앞 횡단보도는 길을 건너려는 시민과 여행자들로 붐볐고,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자 나는 재빨리 삼각대를 꺼내 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반대편에서 여러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눈빛에는 따뜻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호저 레인에 들렀다. 한때 주변 상점들의 뒷골목이었던 이곳은 이제 거리 예술가들의 그라피티로 가득한 관광 명소가 되어 있었다. 벽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과 괴물, 악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그 사이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어 문장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골목은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는데, 그중 유독 여자친구의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어주던 인도인 커플이 눈길을 끌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두 분 같이 사진 찍어드릴까요?” 하고 말을 건네자,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도서관인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을 찾았다.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실내에서 공부하거나 글을 쓰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 방문하게 되었다. 트램에서 내려 도서관 앞에 서자 마치 판테온 신전 앞에 선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넓은 석 계단이 위로 길게 뻗어 있었고, 그 위로 대칭을 이루며 늘어선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 있었다. 주변에는 거리 음악가들의 버스킹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음악을 감상하며 잔디에 앉아 점심을 먹거나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6층 규모의 거대한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자, 중앙의 원형 홀을 중심으로 길게 이어진 책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짙은 갈색의 나무 책상 위에는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학생들은 노트북을 펼쳐 조용히 공부하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치 론과 해리, 헤르미온느가 시험공부를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꼭대기 층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저 사람들은 어떤 공부를 하고 있을까?” 하고 혼자만의 상상을 펼쳤다.
전날 야간 기차에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관광을 하는 내내 눈이 자꾸 감겼다. 몸이 지쳐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아시아 마트에 들러 치즈 불닭볶음면 한 봉지와 포도맛 환타를 샀다. 숙소 부엌에서 치즈 불닭을 먹다 보니, 호스텔에서 일하는 대만 친구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지게 되었다.
“이거 불닭이라고 한국에서 유명한 라면인데 한 번 먹어볼래? 근데 조금 매워.”
“나 불닭 알아! 한 번 먹어보고 싶어.”
대만 친구는 젓가락으로 그릇에서 면을 집어 자신 있게 한 입 맛보았다. 처음에는 꼭꼭 씹더니, 끝맛이 매웠는지 갑자기 냉장고로 달려가 우유를 꺼내 벌컥 들이켰다.
“와, 이거 장난 아니게 맵네! 그래도 맛있어.”
땀을 뻘뻘 흘리던 대만 친구는 상의를 벗고 운동 중이던 친한 프랑스 친구를 보더니, “이거 매운 라면인데 너도 한 번 먹어봐”라고 권했다. 친구의 기를 눌러보려는 장난기가 묻어나는 제안이었다. 프랑스 친구는 ‘이게 뭐가 맵지?’ 하는 표정으로 여유롭게 한 입 집었지만, 곧 매운맛에 헐떡이기 시작했고 대만 친구는 서둘러 컵에 우유를 가득 따라 건네주었다.
그렇게 셋이서 냉장고에 있던 우유를 모조리 비워버렸다. 그런데 어디서 소문이 났는지 처음 보는 여행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불닭을 한 입만 먹어봐도 되냐고 묻기 시작했다. 예전에 불닭 챌린지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막상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니 새삼 신기했다. 낯선 나라의 부엌에서 함께 나눠 먹은 이 라면 한 입이, 먼 훗날 그들에게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