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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구 Aug 12. 2024

어쩌면 삶에는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삼각대 가방을 다시 메고 무지개색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촬영지로 유명한 초이홍 아파트로 향했다. 좁고 기다란 골목에서 나오니 조밀하고 울창한 현대 건물들 사이로 누비는 거대한 2층 버스와 레트로식 택시들.


그곳에서 에어팟을 꽂고 음악을 재생하니 그토록 바랐던 내 삶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최근에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신발끈이 풀어진지도 모른 채 열심히 달렸던 날들의 순간적인 벅차오름으로 움츠러든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보도 끝에 아찔하게 서서 여행자의 시선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가방의 어깨끈을 붙잡고 있는 학생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씽씽- 차가 쉴 새 없이 질주하는데도 아랑곳없이 무단횡단하는 아저씨는 포장한 음식이 식을 것 같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름 그럴듯한 사연으로 구성된 영화 한 편을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전망이 탁 트이는 자리에 앉았다. 횡단보도에 몰린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 낡고 스크래치로 까져있는 허름한 동네 가게, 여러 색들이 섞여있는 트램. 천천히 걸어서 골목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것과 버스가 향하는 대로 온전히 몸을 맡기며 감상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동아시아 중에 과연 과거와 현재가 서로 공존하는 나라가 홍콩 말고 있을까. 나는 그 매력에 그만 반해 메고 있던 보조 가방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버스가 커브를 돌아 내부가 흔들리는데도 마음에 드는 풍경이 보이면 주저 없이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필름 카메라는 연신 찰칵-! 소리만 반복적으로 나오고는 끝난다. 당장 결과물이 나오지 않고 내가 현상하러 가야지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찍힌 결과물에 대한 나의 상상이 한 틀에 갇히지 않고 곧게 뻗어나갈 수 있어서 그래서 필름 카메라가 좋다.


초이홍 아파트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내리는 손님은 오직 나 한 명뿐이다. 따라갈 사람이 없으니 지도를 실행해 길을 찾는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내고 싶었지만 역시 무용지물이다. 흔히들 알고 있는 초이홍 아파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아파트 안에 있는 주차장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아 지나가는 학생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되지 않는 거다.


이미 말은 걸었고 번역기를 사용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해 초이홍 아파트에 농구장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두 손으로 슛을 넣는 동작을 표현했더니 손가락으로 이쪽 방향으로 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초이홍 아파트의 첫인상은 사실 실망에 가까웠다. 미디어에서는 우아한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는 모습은 보정으로 꾸며 놓은 가상의 곳이었다. 현실은 시멘트가 벗겨져 곳곳에는 검은색으로 스크래치가 그을러 있었다. "이래서 SNS는 믿으면 안 되는구나" 이왕 여기까지 온 게 아쉬우니 가방을 열어 삼각대를 꺼내 배경을 중심으로 각도를 맞추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내 쪽으로 농구공이 볼링 볼처럼 대굴대굴 굴러왔다. 나는 덥석 공을 잡아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을 향해 던지니 그 소년은 나에게 근엄한 표정으로 엄지 척을 날리며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눈부시게 뜨거운 햇빛 아래서 상의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음에도 나는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여러 방향에서 사진 찍기 바빴다. 그러다가 내가 가져온 필름 카메라로도 찍고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운 좋게 한국인 여성 두 분이 계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혹시 필름 카메라로 찍어 주실 수 있냐고 여쭤보았다. 1초의 망설임 없이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나는 내 모습을 필름 카메라로 몇 장 남길 수 있었다. 감사 인사를 마치고 더위를 심하게 먹은 탓인지 앞이 어지러워 삼각대를 정리하고 나니 빗줄기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양팔을 머리 부분으로 가리며 재빨리 뛰어갔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도 잠시 흐릿한 먹구름 사이로 날이 개기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홍콩의 날씨는 정말 믿을 게 못 되는구나. 홍콩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피고 있던 우산을 접어 유유히 걸어간다. 거리 곳곳마다 가득 차오른 물 웅덩이, 건물 틈새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빗물,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로 운치 있는 분위기. 어쩌면 삶에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비 오는 날의 홍콩은 나를 끝나지 않을 꿈을 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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