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 받을 용기
다음 목적지는 익청빌딩으로 영화 <트랜스포머 4> 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초이홍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트램을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었다. 어김없이 내가 타야 할 트램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갑자기 현지인 아저씨 한 분이 내게 유창하게 영어 발음으로 말을 건네셨다.
“어디 가세요?”
”안녕하세요, 익청 빌딩에 가고 싶은데 어떤 트램을 타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알려줄게요”
아저씨는 정류장 전광안내판을 골몰히 보시더니 내게 손짓을 건네셨다.
“저 멀리서 오는 거 타면 돼요.”
“감사합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트램 리더기에 옥스퍼드 카드를 찍었다. 내 뒤에 있던 아저씨도 뒤따라 올라탔는데 한 10분쯤 지났을까, 그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다음 역에서 내리시면 익청 빌딩이에요!“
뒤돌아보니 아까 친절히 길을 알려주신 아저씨였다. 내가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모를 까봐 걱정이 되셨는지 한 번 더 알려주신 듯 보였다. 나는 경황없이 허겁지겁 내렸는데, 그 때문인지 아직도 가끔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든다.
이렇듯 여행을 하면 예기치 못하게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순간이 있다. 처음에는 괜히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나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는 건 아닐까 늘 말을 걸 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을수록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도움을 받을 용기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한국에서 도움이 필요한 여행객이 보이면 먼저 나서서 도와줘야겠다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나도 예전에 신도림역에서 헤매고 있는 미국인 관광객에게 먼저 도움을 건넸던 적이 있다. 그는 구로디지털단지역에 가고 싶은데 어디서 타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냐고 했다. 나는 초조해하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알고 있으니 걱정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안심시켰다. 도착하고 대림역 방면으로 가는 2호선 노선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지하철을 타고 2 정거장만 이동하면 돼요“
길을 알려주고 유유히 떠나려는데 그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어눌한 한국말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뻤다. 누군가에게 ‘나’라는 작은 존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 참 좋았다.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로 인해 한국 여행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엄청난 크기에 압도당했던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저 빼곡하게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조그마한 방에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고 상상하니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답답해졌다.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봉투, 지저분한 벽의 낙서, 베란다에 널려있는 각종 빨랫감. 아래에서 바라본 익청 빌딩의 모습은 홍콩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대신 보여주는 듯 마치 거대한 감옥같이 느껴졌고 그 위에 뻥 뚫린 푸르른 하늘은 홍콩의 화려한 야경 뒤에 감춰진 낯선 이면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1층에는 사진을 찍으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나는 삼각대를 꺼내면 이목이 집중될까 봐 다시 집어넣었다. 그 대신 여행자로 보이는 분에게 다가가 사진을 부탁드렸다. 그는 휴대폰을 낮게 움츠려 광각 렌즈로 배경을 다 담기게 찍어 멋진 결과물이 나왔다. 충분히 사진을 찍고 난 뒤 나가려는데 아까 초이홍 아파트에서 사진을 찍어주신 한국인 두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나는 반가워서 인사를 건넸다. 두 분은 우리도 여기서 사진 찍었다고, 이렇게 또 만나니까 신기하다고 했다.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며 떠났다. 여행이 주는 우연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사랑에 빠진 딤섬
더운 날씨와 더불어 이리저리 움직인 탓에 배가 출출해진 나는 밥을 먹기 위해 딤섬히어(點心到)로 향했다. 18시인데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웨이팅을 했다. 한 10분이 지나니 금방 줄이 빠져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전자 하나를 주셨는데 식기류를 씻어내는 따뜻한 차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한 입 마셨다가 맛이 없어서 바로 뱉었다. 메뉴판에 영어가 적혀있지만 편하게 구글맵에서 새우 시우마이와 튀긴 딤섬 사진을 보여주며 주문했다.
찜통 위에 있는 시우마이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꼬르륵- 거리는 나의 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젓가락으로 하나를 집어 간장에 콕 찍고 호- 불며 입에 넣었는데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새우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시우마이를 다 먹고 나서 곧바로 튀긴 딤섬이 나왔는데, 겉보기에는 한국의 군만두와 닮았다. 나는 함께 제공되는 연유에 찍어 맛보았는데 안에 부드럽고 토실토실한 새우살로 꽉 채워져 있어 바삭한 소리가 크게 났다. 마요네즈 같은 연유 맛과 궁합이 잘 어우러졌다. 나는 이대로 계산하기에는 너무 아쉬워서 손을 번쩍 들며 똑같은 메뉴를 더 주문했다. 103 홍콩 달러(약 18000원)가 나왔다.
내가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지
밥을 다 먹고 나오니 19시로, 18시만 해도 화창했던 짙은 푸른 하늘은 농도가 낮은 파란색으로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20시에 개최되는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구경하기 위해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자유롭게 날고 있는 구름이 참 좋다. 왜냐면 구름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퇴근길로 꽉 막힌 도로, 바뀔 줄 모르는 신호등, 하나둘씩 밝아지는 건물, 가로등 불빛과 차 라이트. 형형색색의 빛들이 모여 홍콩의 밤을 장식하는 이 순간에 나는 지금 미치고 있다.
나는 침사추이에 도착해 벤치에 앉아 서서히 해가 저무는 홍콩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시각은 19시 30분. 이제 30분 뒤, 마법이 일어날 것이다. 이곳에서 산책하는 누군가도, 휴대폰에 집중하는 누군가도, 운동하는 누군가도 잠시 하던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이 분위기에 취할 시간. 이 아름다운 풍경을 계속 보고 있으니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들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학업과 스펙, 경쟁에서 도망치기 위해 떠났던 홍콩.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며 남몰래 내게 속삭여 줬던 홍콩이 선사하는 야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잠재되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