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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so Mar 21. 2022

겁이 많아서 용길 내는 거예요

스물다섯 스물하나 12화를 보며

저는 내 일 아니면 나 몰라라, 나만 아니면 돼, 그렇게 살기 싫어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12화 지승완(이주명)의 대사다. 승완은 교내 폭력 교사를 고발한 죄로 반성문을 써 전교생 앞에서 낭독하라는 벌을 받는다. 물론 거절한다. 잘못한 게 없어서 사과를 할 수 없고 잘못한 게 없어서 반성을 할 수 없다고. 이딴 학교 졸업장 들고는 쪽팔려서 대학을 못 가겠다고. 전교 1등이던 승완은 수능을 한 달 앞둔 시점에 자퇴를 하겠다고 한다.



# 그날 밤, 엄마와 나눈 대화


엄마 : 자퇴 밖에 길이 없니? 전학 가는 방법은..?

승완 : 그건 내 잘못을 인정하는 거라서 안돼.

엄마 : 수능은?

승완 : 못 봐. 검정고시 쳐야 해서.

엄마 : 그럼 지금까지 달려온 1년을 버리겠다는 거네? 네 인생에서 1년을 버릴 만큼 이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니?

승완 : 응. 엄마. 미안해..



엄마 : 휘어지는 법도 알아야 해 승완아. 부러지는 법만으로는 세상 못 살아.



승완 : 알아, 근데 아직 그게 잘 안돼.. 미안해. 미안해 엄마.

엄마 : 아니야, 승완아. 엄마가 미안해.


다음 날, 승완의 엄마는 한껏 힘을 준 차림으로 학교에 찾아와 딸의 길을 응원한다.



엄마 : 학생들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학교가 여기죠? 어 거기 있네, 폭력 교사. 그러고도 당신이 선생이야? 우리 승완이야 이딴 학교 자퇴한다고 인생에 흠집이 나겠어? 자퇴 서류 갖고 와요. 당장 사인하게. 그리고 당신, 지웅이(폭력 당한 학생)한테 사과해. 내 아들 같은 애야. 사과 안 하면 학부모회에 정식으로 고발할 겁니다. 이런 망할 놈의 학교에 내 딸을 맡겼다니. 내 평생 이런 수치가 없네.


승완 : 나, 엄마 닮았네.



승완이의 자퇴가 친구들보다 1 뒤처진다고   있을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앞선 길을 걷고 있다. 삶의 주체가 본인임을 알고 있고, 가까운 사람과 상의할  알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믿는 - 결코 본인이 뒤처졌다 생각하지 않을 자신만의 속도를 아는 아이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속도를 아는 어른일까? 속도를 모르고 달리다 탈이  정비소에  상태다. ktx 따라나섰다가 고장난 무궁화호. 멈추니 보였다. '그러게.. , 주변을 즐기며 나아가는  좋은 무궁화호였지.' 지금은 ktx 부럽지 않다.


19살 혜원(siso)에겐 승완이처럼 꿈 많은 친구들이 함께였다. 희망을 기본 베이스로 노력만 하면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꿈 이야기를 나눴다. 10년이 지난 지금, 중학교부터~대학교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꿈이란 단어는 내뱉으면 안 될 금기어가 됐다. 어쩐지 겪어온 실패들을 들춰 보이는 것 같아서... 혼자서라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너는 요새 뭐 하고 싶은 것 없어?"라고 물었지만 “그거 다 돈 들잖아”로 철옹성을 세우니 더 이상 말을 뒤이을 수 없었다. 주식이 올랐니 내렸니, 집은 어떻게 사니, 연금이며 카드값이며 월급은 스쳐 지나간다는 통상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들. 혹은 샤넬은 얼마고, 디올은 얼마고, 연예인 누가 예쁘니 못생겼니 하는.. ‘우리'는 하찮고 ‘남'들이 부러워 결국엔 비교만 남는 이야기들을 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꿈에 대한 확언을 들으면 꿈꾸고 있지 않은 자신의 못마땅함을 들키기 때문일까? 아니면 꿈 따위 꿀 사회가 아니라는 가르침을 깨달았기 때문일까?(이건 합리화다.) 나는 이런 친구들 사이에선 망상에 젖어 분위기를 다운시키는 재미없는 친구였다. 나 또한 그런 자리가 재미가 없었다. 나와 다른 방향과 속도에 있구나 인정하니, 명품 백이 꿈보다 앞서는 친구들과의 멀어짐이 아쉽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을 도전하다 보면 좋아하는 일을 찾을 거예요.
그럼 힘든 과정마저 받아들일 수 있고, 아침이 설레고 즐기는 하루를 보낼 수 있어요.


이런 뉘앙스의 콘텐츠가 유튜브나 출판물, 여러 강연에서까지 흔히 다뤄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누군가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는 것은 정작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반증 아닐까. 혹시 당신은 "누가 몰라요? 이제 이런 말 지겨워요", "뻔한 소리 하네요"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의 노력을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만큼 노력해 본 적도 없다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


회사를 관두고 도전의 출발선에 다시 섰다. 이 멈춤엔 포기와 용기 중 무슨 이름표가 붙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관두는 것이 용기였음은 분명했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용기가 적힌 이름표를 확실히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일주일이 넘게 한 줄도 적지 못했다. 몇 주에 걸쳐 글을 수정해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고, 그 덕에 한 번에 합격을 하긴 했는데.. 머리로는 일단 뭐라도 올리자고 되뇌었지만 쉽게 노트북 앞에 앉질 못했다. 무슨 글을 쓸지, 무슨 그림을 그릴지, 뭘 배울지 리스트 업을 하며 뭔가 하고 있단 핑계로 세상에 나갈 타이밍을 늦췄다. 이 모든 건 불안함 때문이었다.


불안함을 잘 티를 내지 않아 주변에서 내게 ‘너의 결단력이 부럽다’, ‘용기가 대단하다', ‘어떻게 상사에게 회사 내 문제들을 토로할 수 있냐' 이야길 한다. 그런데 나도 승완이처럼 휘어지는 법을 모르고 부러지는 법만 알았던 것뿐이다. 나는 되려 휘어지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부러지기 위해서 수많은 겁나는 밤들을 지새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러 결정들에 앞서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살피고, 해결할 방법들을 떠올리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야 할 문제라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낼지 단어 하나 조심스러웠다고. ‘저희는'이라고 말할지, ‘저는'이라고 말할지 수백 번 고민했다고. 심장이 터질 만큼 두려웠지만 더 좋은 환경에서 함께 하고 싶으니 했을 뿐이라고. 원래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고 보니깐 그게 용기였다고. 어쩔 땐 상생보다 '나만'을 위하는 현실에 박탈감과 무력감을 느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지금도 나의 꿈이 너무 막연하고, 들어오는 돈은 없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통장 내역을 떠올려야 함이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고. 이런 보잘것없는 내가 세상에 나의 이야기를 내보여도 되는지 두렵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불안한 마음을 여기에 남겨두고, 내일을 살아가려고.


남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날 굉장히 괴롭혔던 ‘비교의 늪’에 빠져있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어려움은 없냐고. 손을 내미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쯤은 필요할 거라는 믿음 하나로. 느리더라도 꾸준히 어제보다 나은 하루를 살아갈 거고, 매끈한 길을 달려온 스포츠 카보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온 아빠의 트럭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디디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고흐의 붓질처럼 분명히 남을 텐데, 당신은 무슨 색 물감을 칠할 거냐고 묻고 싶다. 똑같은 세상보다 다양한 사람이 넘치는 세상이 더 흥미롭고 밝을 거란 걸 증명할 거고 증명해낼 거다. 훗날 승완이 같은 친구들을 만났을 때, 성적보다는 본인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해냈음을 칭찬해 주는 어른이고 싶으니까. 남들이 가는 길 그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부딪혔으면 하니까.


그래서 지금이라도 다시 배우려고 한다.

늦었다고 생각한들 어쩌겠나. 지금이라도 하는 수밖에!




* Q. 늦었다고 생각한 일들을 쭉 적어보세요. 도전할 수 있는 게 정말 하나도 없나요?


* 추천곡 : 김필선 -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

https://www.youtube.com/watch?v=LWXVYhX5ubs


* 관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hcuBrEh09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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