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큰아빠를 만나, 이전에 적어둔 이 글이 떠올랐습니다.
(사진 속 맨 왼쪽이 큰아빠, 그리고 안겨있는 나)
드라마 <그 해 우리는> 속 다큐멘터리 감독 김지웅이란 인물이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당신께 줄 수 있는 거
딱 하나밖에 없다고.
지금 당신 인생의 한 부분을
기록해 주는 거.
맞아 이렇게 말하면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지.
그런데, 그걸 찍고 나면
그리고 그걸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되면
그때서야 이게 무슨 의미인 지 알게 돼.
내 인생에서 순간을 기록해
간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값진 건지.
나에게도 그런 영상이 있다. 큰아빠의 캠코더에 남아있던 영상이다.
영상 모퉁이에 찍혀있는 날짜를 보니 1998년 추석이었다. 10월이었지만 날이 무더웠는지 오빠는 러닝셔츠차림이었다. 큰아빤 우리를 상대로 <누가누가 ㅇㅇ 잘하나> 콘테스트를 자주 펼쳤는데 난 언제나 노래 앞에선 줄행랑을 쳤었다.
그날의 노래자랑 무대는 집 앞 계곡이었다. 오빠는 바위 위에서 개다리춤을 추며 박수로 박자까지 맞춰가며 '곰 세 마리'를 열창했다.
"으쓱으쓱 잘한다~"
오빠의 노래가 끝나고 큰아빠는 내 차례를 알렸다.
"아이고 잘하네! 다음은 혜원이!"
"싫어여~~"
역시나 나는 거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둘둘 말아 올린 치맛자락을 잡고는 도망을 가다 발이 꼬여 물에 풍덩 빠져버렸다.
"혜원이 빠졌다~ 혜원이 빠졌다~"
큰아빠의 놀림에 호응이라도 하듯 오빠는 얄밉게 으캬캬캬 웃고, 나도 이 상황이 웃기긴 한데 찧인 무릎이 야속하게 아파왔는지 계속 쓰다듬고 있는 그런 영상이었다.
관찰자였던 큰아빠의 표정은 영상에 담기지 않았지만 다정하게 웃고 있었을 것이다. 먼 훗날 우리 남매가 이 영상을 보며 즐거워하겠지 생각하셨으리라.
지난날의 내 모습을 영상으로 마주하니 뭉클했다. 아무 걱정 없이 놀던 때가 그립기도 했다. 잊어버린 줄도 몰랐던 것을 큰아빠 덕분에 되찾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들을 큰아빠는, 엄마 아빠는 기억하겠지. 나였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누군가는 기억한다라. 기록은 재현이란 것을 알게 됐다.
30초도 되지 않는 이 비디오는 내게 뭉근히 오래 남았다. 마음이 응어리질 때면 찾았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 속에서 어쩌지도 못할 때, 이미 행복으로 완료된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개운했다. 그냥 저때처럼 천방지축 놀고, 넘어지고, 웃어보자고 용기 냈다.
절대 잊지 못할 거라던 순간들도 언젠가는 희미해진다. 사라지는 것들을 아직은 끈질기게 붙잡고 싶다. 아주 사소한 부분들 조차 잊고 싶지 않다. 그래서 기록한다.
많은 것들을 현재에 머물게 하고 싶기에 글을 적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고, 그림을 그린다.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들과 마음에 지그시 자리 잡는 여러 조각들을 남긴다. 평범하기에 애틋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곁에 둘 수 있다면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내 추억들로 그대가 위로받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욕심내고 싶다. 그대에게 가닿아 스스로 품고 있던 달콤하고 예쁜 조각들을 잔잔히 꺼내봤으면 좋겠다.
그대가 추억에 흠뻑 젖기를 바란다.
아빠가 끌어주던 빨간 대야 썰매같이 따스한 추억들로 오늘의 살아갈 힘을 얻기를. 소중한 이들과 그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때론 내게도 들려주기를. 바란다.
기록도, 추억도 다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추억 여행을 떠난다. 사랑을 느끼고 위로받기 위해서.
시대를 앞서 나간 브이로그 1세대 큰아빠 덕분에 기록의 가치를 다시 한번 느꼈고, 오늘도 난 애정을 담아 나의 가족과 고향을 찍었다.
반짝이는 일기를 적어 가기에 충분한 당신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다.
* Q.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나요?
* 추천곡 : HEN - 아름다운 것들
https://www.youtube.com/watch?v=hnlcUPlhV-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