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에 대한 포효. 이윽고 바다는 평온해졌다.
이승원감독의 세자매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가족이란 당위성이 과연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특정적인 부분에 이르러서는 가부장적인 사회로 규정되어 졌던 과거를 반성하는 장면들이 이 영화의 주제로도 비춰지기도 하지요. 당위적인 이야기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란 개념을 함께 이야기 할 수도 있을겁니다. 정언명령은 보편과 일반에 대한 당위로써의 도덕적인 의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도덕 법칙을 정당하게 따르는 것을 말하지요. 이러한 당위에 대한 사유는 칸트가 객관적으로 이를 구성하는 체계를 세웠을지라도 자연스레 주관적인 도덕규범을 요청하게 되고, 이러한 규범을 지키는 일은 더 나아가 일종의 강박증 같은 것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박은 프로이트의 논의에 의하면 일종의 불안과 공포를 억제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의 강박에 해당합니다. 불행하게도 불안한 심리상태의 기원은 인간 근저에 위치하고 있는 '가족'이란 구성원에 의해 발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세자매는 과부장적인 사회의 상처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여자들의 전형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강박의 이야기를 하자면 대표적으로 둘째인 미연(문소리배우)을 떠올리면 바로 그렇습니다. 미연은 교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전형적인 집사입니다. 성가대 지휘자로 교회에서 신앙심을 인정 받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녀는 믿음이란 당위를 가족들에게 숨막히게 강요하고, 세상의 모든 사건의 근거를 믿음과 연관시켜 판단하는 사람처럼 비춰집니다. 그래서 미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우한 가정 환경에 처한 첫째 언니(김선영배우)인 희숙과 가정은 있지만 가족에서 가장 골칫덩어리로 보이는 셋째 미옥(장윤주배우)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모든 것이 해결 된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그런 사람이지요.
동생의 핀잔에도 미소를 보이며 교회를 다닐 거라고 말하는 희숙의 상황은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채를 지고 도망친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서 돈에 쫓기는 듯이 살아가고 있었고, 하나뿐인 딸은 음악하는 남자에게 미쳐서 불량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엎친데 덮친격으로 건강까지 악화되어 암선고까지 받고 말았습니다. 그녀를 향한 불행은 끝도 없이 그녀의 집에 들이닥치고 있었습니다. 셋째의 역할을 맡고 있는 미옥은 희옥보단 상황이 한결 나아 보입니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이혼한 어느 착한 남자와 결혼하여 그나마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남자에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미옥의 기괴한 행동을 보고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핸드폰번호에는 돌아이라고 저장을 해놓기도 했지요. 미옥은 자신의 아들의 의젓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 상담을 하러 가기도 하고, 가족들을 위해서 음식을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아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었죠.
반면에 점차 강박을 벗어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둘째인 미연은 이 영화의 목소리를 가장 크게 대변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녀에게 '신앙'적인 영역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을 합니다. 그것은 남편의 불륜이었습니다. 게다가 교회에서 자신과 함께 성가대로 섬기는 청년과의 불륜이였지요. 미연은 청년과 남편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고, 기도회가 끝난 밤에 그녀의 얼굴을 짓 밟고 '기도'하겠다며 위선적인 말들을 내뱉습니다. 그리곤 미연은 남편에게 남편이 청년에게 선물해줬던 반지를 보여주게 되는데, 이를 통해 남편은 그녀를 떠나게 되고, 그녀는 나중에 남편을 찾아가 기독교에서 금하고 있는 '이혼'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욕을 시원하게 내뱉습니다. 영화에서 비춰진 미연의 강박의 사슬을 점차 벗어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이런 세자매의 이야기는 '아버지'라는 꼭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아버지의 '폭력'은 세자매의 현재를 이루는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생일에 온 가족이 모여 기도하는 장면은 마치 폭력을 은폐하기 위한 신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제사처럼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자매의 포효속에서 아버지는 끝내 자신의 머리를 창문에 강하게 박으면서 반성하는 듯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가부장적인 면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사과의 말을 할 수 없었던 아빠가 마치 죽을 것처럼 가족을 향한 피의 절규를 호소하는 장면을 통해 가족이란 잔유물이 사회에서 규정된 당위와 규범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왜 아버지는 폭력이란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람으로 살아왔을까라는 질문 말이지요. 이제 세자매는 평온한 바다를 바라보며 흑백영상으로 상기했던 과거의 바다는 이제는 컬러로 된 살아 있는 바다로써 각인 됩니다. 그렇게 세자매를 지배했던 잊고 싶은 과거는 이제 현재를 통과하여 자유롭게 흐르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가족이란 여명아래 유영하는 당위는 소리를 잃고 평온함을 얻었습니다. 삶의 진정한 당위에서 벗어나기 위한 포효는 그렇게 우리를 희생된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