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우주는 흔적없이 배회하는 나그네처럼 끊임없이 상기된다.
찰리 카우프만의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보았습니다.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인간의 감각경험, 욕망과 정념, 수학적 인식 등을 의심하는 사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이러한 확실해 보이는 사유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갈팡 질팡하며 플라톤이 이데아를 규정하는 행위와 같은 종교적이면서 인간창조의 근원과 같은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갈구해 왔습니다. 이러한 철학적인 문제는 '진리'가 존재하느냐로 귀결 될 수 있을 겁니다. 진리를 증명하는 작업은 명증성을 요구하는 작업이고, 확실한 근거가 뒷 받침 되어져야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 대해 전연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조현병을 앓고 있거나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에는 망각 상태에서 기억은 얼마든지 조작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고로 기억상실을 경험하는 이들은 더욱 그러하겠죠. 그러한 혼재된 기억은 우주를 정처없이 부유하는 우주선과 같아 보입니다. <셔터 아일랜드>에 디카프리오가 정신분열증으로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의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던 비극과, <아이덴티티>의 주인공인 말콤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겪고 다중인격의 착란 증세가 이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모종의 탈자적인 상태에 휩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탈자적이란 건 존재가 '밖' 뛰쳐 나온 형태에서의 '봄'(sehen)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화자의 기억속을 유령처럼 밖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영화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기억이란 언제나 주관적인 바라봄을 선행해서 존재하곤 하니까요.
이 영화는 초현실적인 면모를 관망하게 되는 모호한 매력이 존재합니다. 모든 인물들의 대화나 모습들이 일관적이지 않고, 영화의 연출이 갑작스레 바뀌기도 하며, 처연한 눈보라가 자동차를 세차게 밀어 닥치는 장면을 긴 시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영화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도리어 희미해지고 맙니다. 가령 여자 주인공의 이름, 전공, 직업들은 시도때도 없이 변화하여 불려지고, 처음엔 건강하게 비춰졌던 제이크의 부모님들이 병마로 죽어가는 모습을 비추기도 하고, 두 남녀 주인공이 복제되어 또 다른 '나'가 기억을 모사로 한 누군가와 싸우는 장면들은 미학적으로도 훌륭하지만, 영화적인 의도를 설명하기 위한 복선으로 작용합니다.
참으로 복잡해 보이는 이 영화의 메세지는 제법 단순해 보입니다. 마지막에 늙은 제이크가 물리학상을 받는 어느 한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삶의 모든 이유가 (사랑하는) '당신'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를 통해 직시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란건 기억의 망상처럼 떠 돌아 다니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마치 양자물리학이 규정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인 것처럼 물리학자인 제이크의 외침은 '진리'를 외치듯 영화에 투영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이크가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건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자신이 원하고 바래왔던 고백을 할 수 있어서라고 볼 때, 이는 그리움의 서사와 스산하게 부딪히며 우리의 현실을 직면하게 되는 요소로 발화됩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남겨진 눈으로 뒤덮힌 차를 비출때의 쓸쓸함은 이제 그만 사랑하지 못했던 이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을 지체 하지 말고, 제이크와 같이 사랑을 호소해 보라는 어떤 반어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로 이별과 같은 부정의 의미를 담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랑을 하지 못했던 과거를 벗어난다는 긍정의 의미로써 회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린 미련의 고통에서 벗어나 용기를 갖고 기억이 갖고 있는 속박에서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