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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평살이 Apr 22. 2021

장 뤽 고다르의 경멸(1963)을 보면서

신과 인간 사이의 무규정성

고다르는 알려지다시피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영화 혁명가로 다소 난해한 영화연출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으로 그 전에 영화들이 보여주던 보수적이면서 관습적인 영화였다면, 이러한 틀을 벗어나 혁신적이면서 과감한 영화를 시도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고다르가 있었죠. 경멸은 그가 연출했던 작품중에서 그때까지 영화 중 가장 비싼 영화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아트 필름으로 다시 개봉되기 전까지는 혹평을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죠. 사실 고다르의 영화세계 자체는 '규칙'을 깨는 방식의 영화를 추구했는데, 이 경멸이란 영화는 고전적인 연출과 규칙 위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누가 봐도 일반적인 영화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 될 때 당시에 브리짓 바르도라는 팜므 바탈로 유명했던 배우가 출연해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더 화제가 되었던 것은 이 섹시한 배우의 엉덩이가 등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영화 평론가는 그걸로 충분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영화는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 [경멸 disprezzo] 을 소재로 폴 자발(미셀 파콜리)와 그의 아내인 카미유(브리짓 바르도)의 관계를 토대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로마에서 극작가였던 폴은 미국의 프로듀서인 제레미 프로코슈(잭 팔란스)에게 고용되어 프리츠 랑(그 감독 프리츠 랑이 맞습니다)이 감독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영화화하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수정해 달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영화에서 문제의 발단이 되는 것은 이탈리아의 스튜디오에서 프로코슈의 빌라로 가야 할 때 폴은 택시를 타고 갈테니 그의 아내인 카미유에겐 프로코슈의 차를 타고 먼저 가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폴과 카미유는 그들의 아파트에서 오랜 시간 혈전을 벌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에 3분의 1을 차지하는 만큼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비춰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점차 둘 사이의 간격은 좁혀 질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카미유는 자신을 향해 접근하는 프로코슈의 관심에 마음을 흔들려 버리고 맙니다. (반면에 카미유는 통역을 도와줬던 프란체스카에 대한 호감을 갖고 추파를 던지는 폴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었지요) 결국에 프로코슈와 함께 카미유는 떠나게 되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 그 둘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지막에 프리츠랑과 폴의 대화, 그리고 트래킹 숏으로 영화 현장과 호수로 연결되는 장면을 서서히 비추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경멸이란 영화는 트래킹 숏과 같은 기법을 통해 인간의 시선을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으로 비춥니다. 그 운동은 느릿 느릿하게 이동하고 멈췄다를 반복하는 무 질서속에 질서처럼 전개 됩니다. 그래서인지 연출은 관습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연결해서 플룻 자체에 공백을 넣어 버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피콜리가 총을 챙기지만, 그 총은 의미 없이 소모되는 것처럼 보이고, 자동차 사고로 죽게 되는 프로코슈와 카미유가 어떻게 죽는지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고 현장에서 죽는 그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비출뿐입니다. 이는 왠지 기존에 주류 영화계에 에 휩쓸린 영화가 어떤 종말을 맞이 하게 될지를 여과 없이 연출해 내는 것 같기도 하지요. 또한 폴과 카미유가 아파트에서 다툼을 하면서 이유 없이 등장하는 플래쉬백과 공상들, 그리고 빨간색, 파란색 필터들을 넣어 과연 경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라갈 수 없게끔 만듭니다. 포착할 수 있는 사실을 포착할 수 없게끔 하는 이러한 연출 기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조화 같은 것처럼 체험되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도 이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프로코슈는 미국의 전형적인 제작자로 자기주장이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바르도는 전직 타이피스트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섹시한 여성이고, 위대한 예술가로 손 꼽히는 프리츠 랑은 극 중에서 끔찍한 단편 영화 감독에 불과합니다. 등장인물이 '해야 할 것' 같은 것과 '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한 붕괴 같은 것이 영화에 녹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형적인 것과 비전형적인 것들 사이를 영화 자체에서 투사하는 방식으로 전개 되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여러 금언들로 매개 된 영화라고 볼 수 있는데, 단테, 휠덜린, 브레히트, 프리츠 랑등에게서 따온 말들을 싣어서 경멸이란 영화의 제목에 무색하게도 이유 없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사유 형식에 독창성을 부여하기도 하지요. 결론적으로 관객들은 금언과 영화의 관계를 그 내러티브안으로 몰입해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떤 무모한 성질의 것으로 변주하여 각인 됩니다. 특별히 영화에선 한 가지의 울적한 음악만이 울려 퍼지는데, 이 음악은 신들의 시선처럼 유려하게 기의되어 시종일관 신을 향한 인간의 울림과 같이 흐느끼는 것처럼 들립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폴의 모습을 익스트림 롱 숏으로 부터 시작하여 트래킹 숏으로 비추는 그 일련의 과정이 신을 향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인간의 전 과정을 그려내는 것 처럼 비춥니다. 롱 숏에서 폴이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은 마치 바벨탑을 뚜벅 뚜벅 걸어가는 인류의 처량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결국에 흐르는 강물을 비출수 밖에 없나 봅니다. 어디로 흘러 갈지 모르는 강물에는 거대한 운동성과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존재하니까요. 그게 삶이기도 하고, 그게 고다르에게 있어서 영화이기도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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