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의 전가를 짊어진 고통받는 자의 무게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를 봤습니다.
이 영화는 곡성의 연출부를 담당했던 김의석 감독의 첫 장편영화 데뷔작입니다. 이 영화는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만큼 인물들의 감정선을 담아내기가 수월 했다는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실제로 전여빈 배우가 감독의 연기지도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 이상을 더 담아낼 수 있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지요.
영화는 갑작스레 실종된 경미라는 인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들은 경미가 한강에 투신했다는 증거인 가방과 신발들을 통해서 투신의 증거와 이유를 찾아가게 되고, 그 이후에 경찰들은 경미의 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인터뷰를 통해서 자살의 동기를 찾아내기 시작하죠. 인터뷰 가운데 경미와 관계가 있었던 인물인 영희(전여빈)와 한솔(고윤희)에게 그 이유를 찾게 되고, 특히 자살의 동기를 크게 제공했다고 생각하는 영희에게 같은 반 아이들은 왕따를 시키기도 합니다.
결국에 발견되지 말았어야 할 영미의 시체를 한강에서 발견하고, 경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학교에서도 이런저런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희는 장례의 현장에서 화장실로 들어가 독극물을 먹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다행히도 구조되지만, 독극물을 타고 흘러 들어간 목과 장기는 큰 손상을 입어 회복하기 전까지 음식물을 기구를 통해서만 섭취한다던가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이르게 됩니다. 상황이 역전되어 영희의 자살소동은 죄의식을 삭감하는 것 같은 행위로써 아이들에게 비치고, 경미의 자살은 사실 영희가 절대적인 계기를 제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죠. 처음에 영희의 경찰과의 인터뷰를 통해 분노를 갖고 있었던 어머니(서영화)는 자살소동 후에 그녀에게 모종의 동정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에 영희와 한솔이는 영미의 어머니에게 찾아가서 어떠한 사실을 말하게 되는데, 그 사실을 들은 영미의 어머니는 식당에 있는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며 자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는 경미와 영희가 함께 걸었던 터널은 영희 혼자 걷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가 됩니다.
이 영화는 연대에 대한 이야기이자, 더 나아가서는 연대의 죄책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르네 지라르가 '희생양' 이론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간단하게 말해서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을 때, 희생양에 해당하는 소수자의 기행이 지목되고, 이 희생양에게 트집거리를 포착해서 희생양에 대한 집단 폭행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영화에서 고스란히 드러내게 됩니다. 경미의 자살을 누구의 책임으로 물을 것인가를 했을 때 그것은 경미와 최대한 관련이 있는 영희 혹은 한솔이 표적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죄의식은 마치 소리의 파동처럼 '말'로 전파가 됩니다. 학교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경미의 학교생활을 예로 들어 자살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도 하고(예를 들어 경미가 북유럽의 우울한 노래를 주로 들었다던가), 경찰과의 인터뷰를 하는 같은 반 아이들은 경미와의 관계를 자세히 언급하지 않기도 하고, 그 인터뷰 중 담당 형사의 추궁도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영희와 경미와의 관계가 자살의 근거가 되는 걸로 사건이 종결되면 그걸로 사건을 마무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가장 친밀했던 영희의 친구인 한솔이 조차도 자신의 죄의식을 전가하기 위한 대상으로 영희를 걸고 넘어가면서 죄의식은 연대의 이름으로 희생양을 끊임없이 찾아 나섭니다. 죄의식의 고리는 마치 폭탄을 돌리는 것처럼 말을 통해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 영화는 그러한 죄의식의 연대가 위선적으로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비춥니다. 그러한 연대의 장치는 비로써 죽음으로부터 해체되고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던 영희는 죽음을 선택하게 되죠. 장례식장에서 무당을 불러 죽은 경미를 하늘로 보내주는 과정에서의 사운드와 영희가 화장실로 들어가 자살을 시도할 때 등장하는 시퀀스와 그 후 고통스러워하는 영희의 모습은 서스펜스적인 요소를 극대화하며 관객들에게 연대의식의 최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희는 말을 잃어버립니다.
영희는 영화에서 말을 잃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녀의 말은 말이 아니라 그저 죄의식의 근원 그 자체로서 영화에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살은 명확하지 않은 죽음이고, 말할 수 없는 죽음이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먼저 자살의 동기라는 건 규정할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닌 개별적인 동기의 복합체로서 위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어떻게 사람의 말을 잃어가는지를 선명하게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지요. 희생당해야 하는 자와 희생을 버티는 자의 의식이란 건 '죄'에 밀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대에 밀도에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영희는 초반부에 경미에게 '자살'을 권유한 사람으로 비치지만, 점차적으로 '먼저 죽어야 했다'라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비춥니다. 그것은 말을 잃어가는 사람이 향해가는 종착지에 대해서 말하는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겠죠. 흥미로운 현상은 그녀의 자살사건 이후에 다시 태어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때 죽음은 그녀를 구원한 것처럼 보이지요. 이런 연대의 묘한 분위기의 전환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는 연속성 속에서 계속적으로 구현됩니다. 다만 '죄' 자체였던 영희의 부활은 경미를 뒤에서 저주했던 아이를 안아줌으로써 성장해나가는 모습에서도 희망 또한 찾게 되는 듯하죠. 말을 잃은 소녀는 그렇게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꼽은 영화에서 가장 주요한 시퀀스는 처음과 끝부분에 등장하는 '수화'하는 영희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수미상관 법'으로 시작과 끝에 중요한 주제의식과 메시지를 함의하고 강조할뿐더러 영화의 서스펜스적인 요소로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지요. 처음 등장한 수화 씬에는 자막이 없지만, 그 자막이 뒷부분에서야 등장합니다. 자막이 없이 첫 부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아이들의 수화 끝에 박수소리에 '희망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뒷부분의 자막을 통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면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영화의 이미지와 의미가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이 영화의 훌륭한 작품성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할까요.
죄 많은 소녀는 여자 파수꾼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결이 다릅니다. 사실 서스펜스적인 요소를 더욱 잘 살린 게 죄 많은 소녀라면, 파수꾼은 인물들의 심리를 더욱 부각하는데 에너지를 더 쏟는 것 같지요. 가장 좋은 예로 죄 많은 소녀에서 영희의 꿈에서 경미와 함께 클럽에서 음악을 듣다가 영희가 경미의 얼굴을 봤을 때, 그녀의 얼굴이 위에서 떨어지는 검은색 물감으로 뒤덮이는 연출과 같은 것이 바로 그렇지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적인 부분을 적절하게 담은 수작이라는 평가가 됩니다. 물론 불필요한 장면들이 몇 군데 있지만, 영화에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연출이 과하다고 평가받는 부분도 저는 정말 좋게 봤습니다. 죄의식, 죄책임, 연대의식, 등등의 주제의식도 잘 담아냈던 것 같고, 그 중심에서 전여빈의 연기는 영화의 날카로운 시선을 고스란히 잡아내서 연기를 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