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평살이 Apr 20. 2021

오승호의 <하얀충동>을 읽고

충동이란 선입견을 벗어나 이해라는 길로.

소설의 전반적인 인상평은 이야기의 리듬이 빠르고,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해서 속도감 있게 책을 읽을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책을 읽기 전에 책 뒷면에 간략하게 소개하는 문구인 “사람을 죽여 보고 싶어요. 될 수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을요.”라는 자극적인 문구를 보면서 피가 낭자하는 추리소설 한편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소설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사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은 죽여보고 싶은, 어쩌면 통제하지 못하는 ‘충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어떤 태도, 혹은 그들을 어떠한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개인과 공동체의 입장에서 고민 하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배경은 학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학교라는 공간은 모든 사람이 거쳐 가야 하는 사회이고, 가족을 제외한 타자와 함께 삶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부모님의 교육도 학생의 성향을 결정 짓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지만 특정한 시기에는 학교에서 가족도 자세히 모르는 시간을 선생님, 친구들과 보낸다. 전반적으로 학교라는 사회의 축소판이자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삶의 과정에서 살인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 또는 살인자에 관한 인권문제와 선입견 같은 것이 또 다른 살인을 낳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학교의 상담사로 일하는 지하야는 아키나리라는 ‘살인 충동’을 갖고 있는 소년을 상담하게 된다. 그 소년은 학교에 있는 ‘염소’를 죽이면서 내면에 있는 ‘충동’을 확인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충동의 대상을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합리화하여 살인을 도모하는데, 그 대상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명한 살인사건의 주범인 이리이치 가나메다. 이리이치 가나메는 3번의 잔인한 살인사건을 통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사람이다. 죄 값을 치루고 나온 그가 사회에서 어떠한 선입견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면밀하게 살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의 큰 주제로서 야기된다. 


결국 이 소설은 제목처럼 ‘충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충동’이란 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의 흔적이자 취향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질문할 수 있다. 만약 특정한 ‘충동’이 사회에서 규정하는 ‘법’에 위반되어질 경우에서의 선천적인 ‘욕구’라면 어떠한 노력을 기울어야 할지를 말이다. 그 ‘충동’에 대한 인식이 소설에서 어떻게 변주하고 있는지를 지히야와 아키나리, 이리이치를 통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질문을 계속한다. 


실상 인간은 각기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충동들이 내재해 있고, 사실 이것은 이해 할수 없는 모순일지 모른다. 


사실 ‘연쇄살인’을 소재로 하는 영화나 소설들은 우리가 쉽게 접할수 있다. 아니 실제 사건들을 예들을 매체를 통해서 듣고 보기도 한다. 환경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는 반면에 생명체를 죽이는 특정한 사건에서 느끼는 쾌감이 깊숙하게 남아 ‘충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혐오’와 ‘차별’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번 ‘하얀충동’을 통해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지히야와 아키나리의 마지막 대화다. ‘충동’이란 단어를 환기시켜주는 말.

소설에서 늘 부정적으로 사용되어졌던 ‘충동’이란 단어가 변모하는 그 순간은 지히야가 아키나리의 살인충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고 괜찮다고 말해줄 때이다. 물론 타인이기에 상대를 온전하게 받아 들일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세상의 핍박과 조롱속에서도 이 세상을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당연한 ‘혐오’가 이제는 ‘이해’와 ‘사랑’으로 변하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이 소설에서도 발견한다. 


이 부분의 대사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건 대체 뭘까. 난 널 받아들이고 싶어. 아무리 네가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만다고 해도 말이지. 하지만 그 누군가가 내 소중한 사람이라면 난 틀림없이 널 용서하지 못할거야.”

이 세상에 있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시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하게 돼”

“....충동.”

지히야는 고개를 끄떡였다. 흐뭇할 만큼 이 아이는 총명하다.

“살고 싶다는 충동, 죽고 싶다는 충동, 죽이고 싶다는 충동, 세상에는 모순이 맞물린 수많은 충동이 있고 우리는 그 모든 걸 갖고 있어.” 

죽이고 싶지 않다는 충동도.

살아 주기를 바라는 충동도.


작가의 이전글 자크 데미의 <쉘부르의 우산>을 보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