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운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대한민국 정치체제의 근간이 되는 자유주의(liberalism)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주의는 보편적으로 소위 ‘진보'라는 개념에 반대되는 ‘보수'적인 이념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주의는 ‘진보'와 ‘보수' 모두를 포용하는 넓은 의미를 내포한다. 자유주의란 사상의 자유와 인권의 존중 그리고 인간행복추구권을 껴안아야 한다. 정치적 스펙트럼을 모두 포용하여 그것을 개인의 표현과 생각의 자유로 보고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이러한 자유주의적 태도를 갖기 보단, 서로를 향해 옳고 그름의 시비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실정을 우리는 어떻게 해소해나가야 할까? 진정한 자유주의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갈등과 대립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첨예한 양극화현상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중단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완화하고자했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전쟁 이전 해방정국 당시 남과 북의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의 연합을 시도했던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다룰 것이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두 집단이 화해를 이루고 절충하며 합작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배울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좌우합작운동'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굉장히 혁신적인 정치적 시도였다.
1945년 8월 15일 세계 2차대전의 종전이 선언 되고, 패전국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반세기동안 타국에 의해 지배되어 오며 자국의 정부가 없는 상태로 국가가 운영되어 왔다. 하지만 조선은 자국의 힘으로 해방을 이루어 낸것이 아닌,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국들에 의해 해방 되었다. 그렇기에 해방이후 조선에 대한 의결권은 조선이 아니라, 연합국에게 있었다. 1945년 연합국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되었을 시기, 연합국의 주축이었던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은 전쟁이후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카이로,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하였으며, 종전 이후 모스크바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였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종전 이후 냉전기를 암시하였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는 조선의 독립국가 건설과 이를 위한 임시적 신탁통치를 할 것에 대한 필요성이 명확히 제기되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3국은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은 4가지 조항을 설립하였다.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민족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의 창출을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 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빨리 제거하기 위하여, 한국의 산업, 교통, 농업 그리고 한국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한국 임시 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책을 연구 조성하기 위하여 남한의 미군 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제안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 ․ 영 ․ 중 ․ 소 각국 정부에 참고가 되도록 제출되어야 한다.
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 정부의 참가 하에 조선 민주주의 단체들을 끌어들여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또는 조선국가 독립의 확립을 원조 협력(후견)하는 방책들도 담당할 것이다. 공동 위원회의 제안은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신탁 통치(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소⋅영⋅중 각국 정부의 공동 심의를 받아야 한다.
한국 남부와 북부와 관련된 긴급한 여러 문제를 심의하고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행정⋅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조화를 확립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국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3국은 한국 임시 정부 구성을 목적으로 남과 북을 나누어 북에는 소련이, 남에는 미국이 각각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공동위원회는 미⋅소⋅영⋅중 각국 정부에 공동 심의를 받아야 했다. 이들은 조선의 남부와 북부를 담당하여 조선 임시 정부 구성 이후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을 함께 논의하고자 했다.
이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대해 남한 내에서는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찬탁과 반대하는 반탁의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렇게 의견이 나뉘게 된 배경에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반대하였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고 보도했는데, 이것은 정확히 사실과 반대되는 정보였다. 당시 굶주림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공산⋅사회주의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그렇기에 소련의 입장에서는 신탁통치를 하지 않고, 즉시 조선을 해방시켜 자결권을 부여한다면 자연스레 사회주의 체제가 만들어질것을 예상하였고, 당연하게도 그들에게는 신탁통치를 주장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언론이 전달한 기사의 뉘앙스는 신탁통치에 대한 정확한 전달이 아니라, 단순히 외세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식으로 보도하였기에, 또다시 서양세력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한국인들의 불안감을 조성하기 충분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의 여파로 국내에서는 친미 성향의 우익이 반탁을, 친소성향의 좌익이 찬탁을 벌이게된다. 국내에서는 찬탁과 반탁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우익세력은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반탁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일부 좌익 세력에서는 반탁과 독립 촉진 시민대회를 빌미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돌연 찬탁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찬탁, 반탁 세력이 좌와 우의 대립으로 번지게 되었다. 국내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과 소련은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다. 본래의 공동위원회의 목적이 임시정부수립 이었기에 이 위원회의 회의는 건설적으로 흘러갈 여지가 다분했지만,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양끝을 잡고 당겨와 잇기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결론적으로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의견 분립으로 인해 결렬되었다.그 의견이 분립이 된 주요 쟁점 사항은 공동위원회 참여 대상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위원회 참여 단체의 수에 관한 것이었다. 이 쟁점이 발생한 까닭도 당시 국내의 찬탁, 반탁 운동 때문이었다. 소련의 대표는 ‘앞으로 수립될 임시통일정부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을 망라한 대중단결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반대로 미국 측에서는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소수파에 의한 한국지배는 저지'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주요 쟁점과 의견 분립을 정리하자면 다음 표와 같다.
결국 이와같은 의견 분립으로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다음 일정도 잡지 못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국내에는 내부적 혼란이 생기고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희망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한편, 남한에서는 통일정부가 절실했던 정치 세력들의 주도로 좌우 합작에 관한 필요성이 재기되기 시작했다. 우익세력은 미소공위와 협의할 대상인 통일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우익세력은 이승만을 비롯한 사회단체, 중도파 정당들과 함께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비상국민회의는 민주의원이라는 기구를 이승만, 김규식등 28명의 의원들로 구성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준비하였다. 그렇게 미소공위의 재개를 촉진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선명히 하기 위해 발생한 운동이 좌우합작운동이다.
좌우합작운동은 세 차례의 예비회담을 거치고 당시 미 군정장관이었던 존 하지(John Reed Hodge)에게 합작 지지 성명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좌우합작의 시발점은 김규식과 여운형이 개인적으로 접촉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의 만남으로부터 좌우합작운동의 중심이 되는 합작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좌익과 우익이 함께 연합하여 합작을 하자는 시도는 당시 정치, 역사적 배경으로 보았을 때 엄청나게 혁신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시도였을 것이다. 당시 이념의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나기 며칠 전 전라북도 정읍에 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발언을 하였다. 사실상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또한 극좌세력에 있는 박헌영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좌익세력들에게 “기회주의적 반동분자, 반동에 투항한 사람들"이라고 비방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에는 통일정부가 절실했다. 더이상의 민족의 아픔은 없어야 했다. 그렇게 여운형과 김규식을 비롯한 합작위원회는 좌우합작운동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우선, 좌와 우가 갈라진 이유는 이념이었기에 양측의 이념을 적절히 절충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합작원칙을 설정하는 이 과정에서 좌와 우의 적잖은 갈등이 빚어졌다. 먼저 좌익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좌우합작운동의 5원칙을 제시하였다.
모스크바 삼국 외무장관 회의 결정 내용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운동 전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및 민주주의 기본과업 완수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반동거두 배제와 ‘테러’ 박멸 그리고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군정 고문기관 및 입법기관 창설 반대
위 5가지 원칙은 아무리 봐도 우익측에서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주장들이었다. 이런 좌익세력의 주장을 두고 우익측에서는 “전연 합작하지 않겠다는 의사와 흡사하다”라며 남한에도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체제를 실시하자는 것이냐고 비난했다. 이로부터 얼마 후 우익측에서도 합작을 위한 8원칙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에 노력할 것
2. 미소공위 재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소위 신탁 문제는 임정 수립 후 동정부가 미소공위와 자주독립정신에 기하여 해결할 것
4. 임정 수립 후 3개월 이내에 정식정부를 수립할 것
5. 국민대표 성립 후 3개월 이내에 정식정부를 수립할 것
6. 보선을 완전히 실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등의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7. 정치 경제 교육의 모든 제도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정할 것
8.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수립 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케 할 것
우익측과 좌익측의 합작원칙에서 유일하게 공통되는 점은 미소공위 재개 촉진밖에는 없었다. 우익측은 신탁통치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은 입장을 취했으며, 친일파 문제에 대해 다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좌익측에서는 이러한 우익측의 주장에 대해 “이승만의 정치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라며 우익측에 대해 변한것이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좌익측에서는 당시 좌익 세력을 이루고 있던 조선인민당, 공산당, 신민당 3개의 당이 합당하는 일에 대한 의견 분립으로 인해 내부적 충돌이 생기며 좌우합작운동이 주춤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이러한 혼란속에서도 북한을 방문한 이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와 합작 대표들을 개편하고 좌우합작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합작위원회는 좌익측의 5원칙과 우익측의 8원칙을 절충하여 다음과 같은 합작 7원칙을 발표하게 된다.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미국·소련 공동위원회(미소공위)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유상몰수·무상분배)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교통·투표 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양측의 주장을 절충한 합작 7원칙은 우선 양측 다 동의했던 미소공위 재개 촉진을 전제로 한다. 민주독립을 보장하여 3국의 결정에 따라 남과 북이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것을 명시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와 가까웠던 좌익측의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우익측의 유상몰수·유상분배 원칙과 절충하여 유상으로 몰수하고 무상으로 분배하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결정적으로 좌와 우가 합작하는것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친일파 문제는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 설립 이후에 결정하는 것으로 잠시 미뤄두어 당장에 급한일에 조금 더 초점을 두고자 하였다.
이 합작 7원칙을 두고 좌와 우를 망라하고 여러 평가를 받았다. 우선, 우익의 중심세력인 한민당의 반대의사 표명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합작 7원칙의 토지문제와 신탁통치 문제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토지의 문제는 시장경제체제를 추구하던 우익세력들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들은 토지문제를 두고 유상 몰수한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한다면 반드시 국가재정을 파탄낼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반해 당시 우익성향의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세력은 합작 7원칙을 두고 “8.15이후 최대 수확"이라며 극찬을 쏟아냈다. 한편, 좌익세력의 공산당은 자신들이 주장한 합작 5원칙만이 합작의 원칙이 될 수 있다며 7원칙을 전면 부정하였다. 심지어 좌익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합작위원회의 주축이었던 여운형을 납치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에 이러한 결과들은 좌와 우가 원만히 합의하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합작위원회는 그들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미소공위 재개 촉구 성명을 발표하며 하루빨리 통일정부 수립이 이뤄지길 염원하였다. 미소 양국의 당국자 간에도 공위를 재개하자는 이야기가 오고가며 진전이 생기게 된다. 같은시기 여운형과 김규식등 100여명의 중도성향 정치인들은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해 중간파 세력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렇게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위가 개최된다. 하지만 2차 미소공위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소련 양국간의 의견차가 여전히 양극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소련측이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내용을 반대하는 반탁 세력들을 협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것이 그 원인이 되어 결국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한반도의 문제는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미국의 제안에 따라 유엔에 이관된다. 한반도의 문제가 유엔에 이관됨은 더이상 남과 북이 협상의 관계가 아님을 의미했다.
좌우합작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2차 미소공위가 진행될 즈음, 합작위원회의 주축이었던 여운형이 피살당하게 된다. 서울 시내 혜화동 한복판 그것도 낮시간인 오후 1시에, 차에 타 가고있던 여운형의 몸에 두발의 총알이 박혔다. 당시 여운형은 자택으로 가기위해 차를 타고 혜화동의 로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 로터리에는 파출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파출소 앞을 지나던 중, 갑자기 낯선 트럭 한대가 앞을 막아서 저속주행을 하게 한다. 여운형이 타고있던 차량은 트럭으로 인해 시속 8km/h로 달리게 되었고, 이는 사람이 도보로 충분히 차량을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차 범퍼에 올라타 뒷좌석에 앉아있던 여운형을 향해 총 두발을 명중시킨다. 여운형은 총에 맞은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끝내 2분만에 사망하였다. 암살범인 한지근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면된다.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1974년 공소시효가 끝난 이후 자신들이 여운형의 암살을 가담했다는 주장을 하는 4명의 공범들이 세간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에 말에 의하면, 한지근은 사실 미성년자가 아니었으며, 자신들은 당시에 한지근과 함께 혜화동 로터리에서 여운형을 암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고 이야기 했다. 이말인 즉, 이 암살에는 분명히 배후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살해범 한지근은 사면된 이후 전쟁이 일어나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암살의 배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좌익 혹은 우익 세력에서 좌우합작을 멈추기 위해, 중도세력이 생겨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여운형을 죽이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여운형은 역사상 가장 많은 테러와 암살시도를 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는 총 12번의 암살, 테러시도가 있었다. 혜화동 로터리의 암살사건이 그 12번째이다. 어느날에는 벽돌이 날아와 그의 머리를 가격해 기절한 적도 있으며, 길 가던 중에 괴한들에게 곤봉을 맞은 날도 있다. 불발 수류탄이 날아오고, 자신의 집 아궁이에서 폭탄이 터지기도 했다. 다행히 여운형이 집을 비우고 있던 터라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심지어 암살을 당하기 한달 전, 혜화동 로터리 같은 장소에서 암살이 시도되었는데, 차량의 속도 탓에 총알이 빗나가는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 시도에서는 차량을 멈춰세우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은 왜 이렇게나 많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야 했을까? 그는 좌에서나 우에서나 그 어느 쪽에서도 분명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를 지지한 것은 국민들 뿐이었다. 실제로 해방이후 45년 12월 여론조사 “가장 역량이 뛰어나고 양심적인 정치가"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제치고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가 시도했던건 좌와 우의 연합이었지, 분열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는 양측 모두에게 비난과 비판을 받아야 했을까?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소위 이야기하는 ‘중도'세력은 우유부단하고 애매하며 기회주의적인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양측의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일까? 당시의 시대적 과제는 으레 통일정부의 수립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의 최우선 과제도 그것이었다. 하나였던 나라를 분열시킨다는 것은, 민족의 아픔을 또다시 겪는다는 것은 있을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또한 냉전시기 하나의 나라를 상반된 두개의 이념의 정부로 나누게 된다면, 결국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좌우합작운동은좌익세력과 우익세력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미소공위조차도 의견 분립 탓에 제대로된 논의조차 못한채로 결렬되었다. 이러한 양극화를 절충하고 합동하기 위해 힘쓰던 여운형은 결국에 암살을 당하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김구 선생도 마찬가지다. 김구선생의 암살 또한 배후를 알 수 없지만, 당시 남북협상론을 내세우던 김구를 죽인것도 좌우가 합동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시도임이 기정 사실이다. 좌와 우의 연합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결말은 아름답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들을 저지하려 하였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서두에 언급한 것 같이, 자유주의는 사상의 자유와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한 자유주의에서 양극단이 잘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필히 중간다리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들이 양극을 이어주는 매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합작위원회를 두고 우익세력에서는 “비좌, 비우이며, 비반탁, 비찬탁이라는 극히 애매하고 모호한 중간파, 회색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중간파"라고 비난했다. 정말 그럴까? 중도세력들은 애매하고 모호하며 회색적이고 기회주의적일까? 그렇지 않다. 합작위원회는 좌익의 여운형과 우익의 김규식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여운형은 좌익계열의 색을 띄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소련의 공산주의에 공감하며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형하여 수용하려 했다. 김규식도 마찬가지다. 김규식은 공산주의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면 필히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익의 이념을 가지고 있던 확실한 우익이다. 이 두 사람은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이여서 합작을 시도하고 중간파를 만드려고 했던 것일까?
이들은 알았다. 당시의 민족적 과제가 무엇인지 말이다. 그 민족적 과제를 하루빨리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념에 고집을 부리지 않고 양보할 준비가 되어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 달리 좌우합작운동은 결국 실패하며 통일정부 수립은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에는 한민족이었던 조선이 두개의 국가로 나뉘게 되며 그 결말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단독정부를 설립하여 다른 국가체제로 간다는 것은 전쟁의 위협을 필히 감수해야만 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이 벌어졌던 것인데, 양 극단으로 치우친 두 집단간의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지 못한 탓에 실패했다. 당시 미군정의 좌우합작 추진을 담당했던 버치(L. Berch)는 좌우합작의 실패를 두고 “오로지 과도한 복수주의에 희생된 일부 좌익과 양반사상의 탈을 벗어나지 못한 일부 우익의 고집에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 했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적지않은 원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히 버치가 지적한 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에 해방정국당시 좌와 우가 합작하지 못한 이유는 이념갈등에 있었다. 첨예하게 갈라진 양 극단의 세력들이 한치의 양보 없이 꿋꿋하게 버틴 탓에 결국 한반도가 분단이 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이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피웠다고만 이야기 하기는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서 그들을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양측의 입장에서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친일파 문제와 토지분배 즉, 경제 체제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친일파의 문제는 당시 좌익측에서 확실히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좌익 세력의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유가 사회주의에 실현에 있기도 하였다. 우익세력이라고 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인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친일파들 또한 해방 이후 우익계열의 정치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좌익세력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요구는 우익세력들에게 불리한 주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토지분배의 문제가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념이고, 그 허상이 온 세상에 드러났다.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시장경제 채택이 그 사례이다. 더이상 공산주의를 칭송하는 사람을 찾기란 드물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해야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공산주의란 굉장히 이상적이고도 매혹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해방이후 한반도의 주적은 다름아닌 가난과 빈곤이었다.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게 생긴 마당에 나라에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먹을것을 나눠주고 입을것을 나눠준다는 것이 얼마나 매혹적 이었겠는가? 실제로 해방정국 당시 국민들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미군정이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무려 70퍼센트의 국민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좌익세력들은 공산주의와 같이 무상으로 토지를 몰수한 후, 무상으로 재분배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익세력들은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의 우익세력들은 자본주의 이념에 입각한 유상몰수・유상분배의 원칙을 고수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도 우익의 주장이 보편타당하게 보일 수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는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양 측의 의견이 적절히 조율될 수 없었던 이유는 두 의견의 차이가 너무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둘을 절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좌우합작 7원칙에서 이 둘의 절충안으로 유상으로 몰수해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꽤나 아리송한 방안을 내놓았다. 애초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화해시키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합작위원회가 내놓은 애매한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이 난것은 그 결과로 우리가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아쉬운 역사이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것이 갖는 한계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어찌보면 실현될 수 없는 몽상에 불과했던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분단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필연 이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에도 극좌, 공산・사회주의 국가들 특히 북한과의 소통은 여전히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있다. 남한 내의 진보와 보수의 공산정권을 대하는 정책은 각각이 다르다. 평화체제의 노선으로 갈 것인가, 북한이 스스로 붕괴되도록 고립시켜야 할 것인가를 두고도 여전히 논쟁이 이뤄진다. 하지만 적어도 남한 내에서의 화합은 더이상 몽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 정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