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와 독일의 재세례파 (Anabaptists)
재세례파 공동체는 전 세계의 교회사를 통틀어 가톨릭의 수도원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공동체 운동이었다. 재세례파는 종교 개혁 당시부터 약 5백 년 이상 지속된 생활 공동체로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연속성에 대하여 교회 역사상 큰 빛을 던져 준 경우이다. 16세기 루터와 칼빈과 츠빙글리의 주도하에 활발했던 종교개혁과 같은 시기에 더욱 철저한 종교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세력인 제세례 파는 참된 교회를 회복한다는 목적을 가졌었고, 따라서 기독교의 공인으로 인한 제도화된 교회는 기독교의 적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 쇠퇴해가고 있던 시기에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1525년 1월 21일 저녁 전에 사제였던 게오르그 블라우록으로부터 최초의 성인세례가 실시되었고 이후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최초의 재세례파 집회가 시작되었다. 재세례파는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되찾고자 했었기에 기성교회의 형식적인 세례 받음으로 성도가 되어 신앙 없이 천국의 백성으로 보장받는다고 하는 제도에 반대하였다. 또한 그들은 종교개혁의 보편적인 내용에는 동의하였으나, 부패한 기성 교회들과 결탁하여 종교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는 의도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적 편의를 위해서 타협하기보다는 성경 말씀 그대로를 철저히 실천해 나감으로써 종교 개혁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경연구의 인문주의적 강조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중 가장 분명한 내용은 그들이 기독교의 전통을 진지하게 다루어본 결과 가톨릭과 교회의 종교 개혁마저도 성경적 신앙의 기준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는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고 또한 말씀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초대교회로의 회복이다. 그들은 제자도의 확립으로 원초적인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다.
재세례파는 16세기에 지배적이었던 여느 종교세력들과 타협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가치 체계에 있었다. 그들은 현재적 하나님나라를 꿈꿨으며 이를 위해 성경의 가르침,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려 힘썼다. 그들은 신학적 사고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성경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실천하려 했다. 그들은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하여 의를 구한다. 그들은 의를 구하며 사는 삶으로 참포도나무의 열매 맺는 가지가 된다.
그들의 삶에는 또한 단순한 생활이 강조되었다. 자랑을 금했고 높은 경제 수준을 반대했다. 초기 재세례파들은 어떤 교회든지 거부하였으며, 제도화된 교회 전체주의를 거부하였다. 재세례파의 중심 사상은 형제를 돌보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이 ‘형제'가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실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 간의 상호 의존은 삶과 구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들의 중심사상은 문제가 되는 ‘믿음'만이 아니라 ‘형제애'이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명령되었던 것과 같이 서로를 정성을 다해 돌보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이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은 공동소유를 추구하였는데 이는 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와 그들의 검소한 생활이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은 아무것도 자신의 소유로 갖지 말고 형제가 궁핍하여 곤란을 겪지 않도록 모든 것을 형제와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6세기의 재세례파를 요약하면 그들의 목표는 ‘참된 교회의 회복'에 있었으며, 그러한 참된 교회는 ‘철저한 제자도’의 구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에 바탕된 것은 바로 산상수훈이었다.
재세례파 평가
재세례파는 삶을 강조했고 복음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삶이 발견되지 않는 곳에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진정한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 하며 국가와 결탁되면 안 되고 그렇기에 전 세계 기독교화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순수성을 유지해야 하며 원래의 모범을 보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삶을 강조하여 복음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삶이 발견되지 않는 곳에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재세례파는 초기 사도들의 교회가 순수성을 잃었으며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교회의 타락'을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이 교회의 타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약의 가르침을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와 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마음과 입술과 몸 전체에서 일체의 불순한 생각, 추한 언행을 도려 내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며, 비록 신자들은 자기 재물을 빼앗긴다 해도 이에 대항하려 해서는 안 된다.”
루터는 자신들의 개혁에 반대하는 재세례파들을 두고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광신자로 불렀다. 그로 인해 서구 교회사 서술에 있어서 재세례파들은 오랫동안 광신자와 이단으로 불려 왔다. 칼빈도 또한 재세례파를 비난하였는데, ‘개인주의자들, 중세 신비주의의 후손들'이라고 하면서, 신학적 이론만을 가지고 재세례파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앞서 그들의 참된 모습과 실태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이단으로 단정하고 정죄하였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오늘날 칼빈, 루터, 츠빙글리와 함께 종교개혁의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세례파 연구의 원로 헤롤드 벤더 교수는 재세례파를 세 가지로 규정하였다. 첫째, 재세례파 교회는 위임받은 제자들의 형제관계로 구성된 단체이며, 둘째, 기독교의 본질을 이와 같이 구성된 신분 관계의 단체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는 것과, 셋째, 새로운 사랑의 윤리가 작용하는 곳이 재세례파의 교회라고 하였다. 이것은 재세례파가 순수한 아가페적 공동체라는 것과 신자 개개인이 예수의 참제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공동체의 순수성과 완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윌리엄스 교수는 “재세례파는 교회를 개혁하는 데에 헌신했다기보다는 교회를 회복하는 데 생명을 건 자들이었고, 모두 종말론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패한 교회를 초대 기독교로 복귀시키는 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국가와의 분리를 주장했기에 다소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동체가 된다면 교회 본연의 선교 사명을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 영역 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강조했던 칼빈의 가르침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재세례파는 성경 말씀을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그대로 철저하게 실천하는 ‘생활'로써 신앙을 입증해 보여 주었다. 그러한 재세례파의 역할은 정통 주류와 갱신 공동체 모두가 균형 잡힌 기독교를 이루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재세례파는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여 지금도 이 땅 위에 공동체로 존재하고 있다. 재세례파 공동체의 가장 큰 신학적 의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 공동체와 같이 유무 상통하며 완전한 공동체를 현재 우리에게 그대로 재현해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실천하려고만 한다면 초대 교회 공동체와 같은 생활을 지금도 그대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재세례파 공동체는 바로 성경 말씀이 시대를 초월하는 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재세례파 공동체는 4백여 년이 넘은 지금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에게 재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과 존재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개신교 내에서 공동체 삶의 회복
종교개혁가들은 그 당시 수도 공동체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도원생활은 기독교인의 삶의 형태보다 더욱 훌륭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과 이신득의 신앙과 반대되는 공적 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도원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훈련하고 완성케 하는 학교로서 공헌한 것이 수도원이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많은 개신교의 지도자들이나 학자들은 수도원을 목회자와 교회 교역자들을 양육시키는 목적을 가진 공동체로 보았다. 그곳은 종신 헌신자들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그렇기에 종교개혁 시기에 경건주의 주류로부터 다양한 공동체운동이 수도원적 성격으로 종종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