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세상 가설과 피해자 비난 편향
서론 - 정의로운 세상 가설과 피해자 비난 편향
21세기, 인류는 근대화를 거치며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 생존하며 연명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과거의 인류와는 달리, 우리는 더이상 먹을것이 없어 연명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거나, 하루하루 생명이 위태로움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로인해 인류는 발전과 생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자유등 더욱 높은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꽤나 ‘정의'로워 졌습니다. 과거에 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말 정의로울까요? 모든것이 순리대로, 정의롭게 흘러가는 세상일까요? 사실이 어떻든, 인간은 이 세상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J. Lerner)에 의해 20세기 중반 처음 증명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가설은 사회심리학에서 중요한 가정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가설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현상을 뜻하는 피해자 비난 편향(Victim-Blaming Biases)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습니다. 이 글에서는 공정한 세상 가설과 피해자 비난 편향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 대한 조금은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세상은 정말 정의로운가?
멜빈은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정의롭다는 기본 가정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정의로울까요? 사전에서는 정의를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누구도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지 않고 사회구성원 모두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도록 흘러가는 것이 정의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정의롭지 않은 일들을 종종 접합니다. 뉴스나 신문같은 매체를 통해서나, 누군가의 말을 듣거나, 심지어 우리의 일상속에서도 발견되곤 합니다. 당장에 오늘날에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누군가 부당v한 일을 당하고 있으며, 온갖 사회적 불합리함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사회가 마냥 정의롭지는 않은가 봅니다.
세상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는 꽤나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존감을 보호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조절하는 것에 도움을 주며 낙관적으로 살아가도록 도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의로운 세상 가설의 부정적 결과는 바로 피해자 비난 편향입니다. 피해자 비난 편향은 서두에 언급한 것 같이 ‘피해자’라고 여겨지는 대상을 비난하는 편향입니다. “피해자가 피해를 입은 것은 피해자의 잘못에 있으며 이 세상은 정의롭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편향인 것 입니다. 물론 피해자 비난 편향에는 또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은 피해의 대상이 되지 않고 싶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는 비난인 방어 귀인(Defensive attribution) 입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공정한 세상 가설에 초점을 두고자 하니 이 문제는 잠시 미뤄두겠습니다.
피해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아직까지는 다소 추상적이고 실제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왔으니, 이제는 조금 실제적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피해자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피해자 비난 편향은 말 그대로 피해자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법 주차를 해둔 차량을 누군가 실수로 박아서 사고가 났다면, 그 상황에서의 피해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문제는 대체로 양측에 과실이 있다고 판단 되어집니다. 이처럼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피해자’란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피해자’는 말 그대로 피해를 본 사람을 뜻합니다. 피해를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래 상태에서 무언가를 잃었을 때, 시간, 돈, 명예등을 빼앗겼을 때 우리는 피해를 보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럼 누가 그것들을 빼앗아 가나요? 바로 ‘가해자’ 입니다. 앞서 들었던 사례에서는 누가 피해자 인가요? 둘 다 피해자 입니다. 그럼 가해자는 누구인가요? 그것도 똑같이 둘 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 비난 편향은 누구에게로 향할까요? 아마 그것도 둘 다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불법 주차를 한 그 피해자를 비난할 것입니다. “불법주차를 했기에 피해를 당해도 할 말이 없다"라고 하겠죠. 그럼 그 차에 사고를 낸 사람에게는 어떻게 이야기 할까요? 아마 “아무리 불법주차를 했어도 너가 부주의했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이 두 주장은 꽤나 일리가 있습니다. 이 사고의 이해관계자 둘 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있을 시 양측 다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며, 판례를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따라서 피해자 비난 편향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을 때 어느정도 타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비난 편향은 역설적이게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상황에서는 일말의 정당성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수 아파트 살인 사건
한 때 한국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던 사건을 하나 소개 하겠습니다. 바로 2021년에 전라남도 여수에서 발생한 층간소음 살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었으며 너무나 잔인한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전라남도 여수의 한 아파트에서 가해자 A씨와 피해자 B씨네 가족은 낡은 아파트의 얇은 바닥을 사이에 두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B씨네 가족은 B씨 부부와 두 딸, 그리고 B씨의 장인, 장모 이렇게 6명이었습니다. 윗층에 살고있던 B씨네 가족과 아랫층에 살고 있던 A씨는 종종 층간소음으로 인해 갈등을 빚었습니다. 가해자 A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 층간소음은 5년정도나 지속되었었다고 합니다.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A씨는 결국 그들을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A씨가 B씨네 가족을 살해했던 과정은 자세히 묘사하기가 너무나 께름칙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어나가야 할 이야기는 피해자 비난 편향이며, 이것이 얼마나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 사건의 잔혹성을 낱낱히 드러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A씨는 마체테 한자루를 들고 B씨네 집을 찾아갑니다. 그는 초인종을 눌러 집의 문이 열리도록 했고, 열리자 마자 마체테를 휘둘러 B씨의 목을 잘라 살해했습니다. 이후 도망가던 B씨의 아내를 쫓아가 똑같이 목을 잘랐습니다. 이제 남은건 두 노인과 두 아이 뿐이었습니다. A씨는 B씨의 장모인 60대 할머니의 팔을 절단했으며, 장인의 복부에는 20cm의 자상을 남겼습니다. 불행중 다행은 두 아이는 방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웃주민의 신고로 A씨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2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60대 노부부에게 너무나 참혹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 현장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사건현장에 투입된 소방대원은 너무나 잔인한 현장에 트라우마를 겪게 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상담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A씨는 결국 1심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을 확정지었습니다.
왜 피해자 비난 편향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가?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로도 우리는 암울함을 느낍니다. 보통의 경우는 이런 사건을 두고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너무나 잔인하게 한 가족의 삶을 통째로 비극으로 몰아넣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다룬 뉴스영상의 댓글을 보고서 저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에서도 피해자 비난 편향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뉴스영상에서는 가해자 A씨의 잔혹한 살해과정을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그 영상에서 그 과정을 묘사했다면 네티즌의 반응은 달라졌을까요? 그 영상의 댓글을 몇개 가져와 보았습니다. “층간소음이 정말 무서운게 처음에는 신경도 안쓰던 소음이 어느순간 머릿속에 꽉 들어차서 사람 미치게 만듬”, “층간소음 겪어본 사람은 알거임. 진짜 정신병 걸려 뒤질거같음”, “근데 층간소음은 사람 미치게 만듬. 이사할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게 소음확인". 이런류의 댓글들은 뉴스영상 댓글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위 3개의 댓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네티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층간소음이 무섭다,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등, 가해자를 비난하기 보단 이번 사건의 원인은 피해자에게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한두사람의 댓글이 아니라, 댓글창의 전체적인 여론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명예살인"이라는 댓글도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편향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좌절하여야 합니다. 살인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인권과 존중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21세기에 어떻게 그런 여론이 형성될 수 있을까요? 피해자 비난 편향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규정될 때, 그 편향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잃게 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경우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가해는 어떠한 사유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결국 우리는 세상은 그 자체로 정의롭지만은 않다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정의롭다고 가정하는 공정한 세상 가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이어지는 피해자 비난 편향은 우리에게 더욱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가져다 주는 역설에 빠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시와 사례를 통해 피해자 비난 편향이 어떤 경우에는 어느정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손 치더라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나뉘는 경우에는 절대로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정의를 회복하며 살아나가야 할 것인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