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각본, <초록물고기> 조감독 등 작가적 빌드업을 쌓아 온 오승욱 감독과 최고의 배우라는 데 이견이 없는 전도연 주연의 영화, 게다가 훌륭한 안목의 소유자 박찬욱 감독까지 제작에 참여했지만 <무뢰한>은 개봉 당시 처참히 망했고 큰 반응도 얻지 못했다.
영화의 외피만 보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보인다. 범죄자만큼 부패했고 수단방법 안가리며 범죄자들 잡아 쳐넣는 피폐한 형사와 한때 잘 나가던(?) 텐프로였지만 돈 많은 할배 애첩 인생을 포기하고 그 부하와 야반도주한 댓가로 빚에 허덕이며 외곽 동네 룸살롱 마담으로 하류인생을 살아가는 여자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이다. 여자의 애인이 살인을 하고 도망치는데 그를 어떻게든 잡기 위해 (사명감보다는 실력 발휘 차원과 더불어 검은 뒷돈도 좀 받을겸) 형사는 이 여자에게 거짓으로 접근하며 둘의 만남이 시작된다. 거짓과 배신이 가득 찬 세계에서 각자 오래 질기게 버텨 온 이들은 베테랑답게 당연히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한다. 하지만 어느덧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연민 혹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 얼마나 지나치게 진부하면서도 통속적인 소재들인가!
뿐만 아니라 영화의 색채와 톤은 시종일관 어둡고도 칙칙하다. 이 영화는 멜로라는 카테고리에 색인되어 있지만 그에 안어울리게 '하드보일드'라는 꼬리표가 덧대어져 있다. 이 두 남녀간의 감정과 그 변화와 진폭은 꾹꾹 억눌려진채 표현되고, 영화 전개에서 그 어떤 재미도 웃음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이 영화는 가장 재미없는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라서 끝까지 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좀 많이.
그러나 역시 참는 자에게 복(?)이 오는걸까? 몸을 배배꼬며 영화가 끝날때까지 견디고 나면 '마침내' 입을 쩌억 벌리게 된다. 놀람과 혼돈, 감탄이 교차해서 나오는 흔치 않은 제스처로, 웬만한 영화로는 택도 없는 강렬한 감정을 만나게 된다. 평범치 않고 기괴하기까지 한 엔딩은 "이 영화 뭐지?" 물음을 계속 내뱉게 만들면서, 기표와 기의가 넘실대는 이 영화의 바다로 빠지게 만든다. 마치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 서래의 바다에 수장되고 마는 해준처럼...(역시 박찬욱과 오승욱 끼리끼리!)
통속적인 영화가 뭐가 다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너무 다르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사랑을 속삭이는 귀간지런 말이나 눈간지런 행동은 눈씻고 찾아볼 수 없지만 이 영화는 지독하게도 심각한 멜로 영화였다. 수많은 멜로 혹은 로맨스물에서 재현되어 온 사랑의 언어와 표현을 하나의 관습으로 받아들인 채, 이를 반복 재현하는 것을 당당히 거부하고 있다. 대신 낯설고 새로운 장면들로 이들의 사랑을 기이하기는 하나 진솔하게 표현해낸다.
가령, <무뢰한>에서 형사가 여인에게 사랑을 깨닫는 순간은 그녀가 외상값을 회수하러 다니는 거친 업무 중 "나 김혜경이야!" 단 한마디로 상대방을 제압해버릴 때인 거 같다. 그 한마디로 이 세상 얼마나 험난하게 버텨왔는지를 처절하지만 동시에 강단있게 말하는 그녀에게 같이 있던 형사의 마음도 사로잡히고 만다. 이 남자는 절망의 순간 다른 누군가를 구원자로 여기지 않고 완전히 혼자 서서 버티는 그녀에게 사랑 (더 정확히는 연민,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연민을 덮어씌우기에)을 완전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고백도 남다르다. 명배우 전도연의 연기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연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이 영화 '잡채씬'에서 이루어진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나서 형사는 "나랑 같이 살면 안될까?" 말한다. 여성은 약간 들뜬 표정으로 "진심이야?" 되묻는다. 이에 곧 남자는 "그걸 믿냐"라며 진심을 냉큼 숨긴다. 아니면 누구와도 진실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그에게는 그 말이 오히려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 이에 여자는 밥상에 있던 잡채를 꾹꾹 삼킨다. 마치 울음을 안으로 꾹꾹 삼키듯이...기대를 했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공허하고 외로운 눈을 다시 그녀는 보여준다. 언제나 혼자이고 그래서 언제나 외로웠던 이 남녀는 이런 식으로만 각자의 마음을 내보일 수밖에 없다.
또한 문제의 엔딩에서는 결국 본인이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다고 여기는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의 행위를 가한다(?). 마약중독자를 돌보는 신세로 정말 바닥 끝까지 추락한 그녀를 남자는 형사의 본분을 활용해 나름 구조해준다. 하지만 자신을 이용해 자신의 애인을 유인하고 바로 눈 앞에서 살해한 형사를 용서하지 못할 뿐더러 이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자신에게 거짓이었던 이 남자에 대한 분노가 그녀의 남은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량한 신세의 자신을 구조해 준 이 남자를 보자마자 다가가 안기며 칼을 꽂는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둘의 유일한 포옹이다. 둘의 힘겨운 사랑의 결말은 결국 서로를 파괴하고 또한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외로움으로 (아무) 사람을 갈구하고 그 가운데 진심일(?) 사랑의 감정도 갈구하지만 결국에는 언제나 혼자임을 깨닫고 사는 인생, 사랑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면서 행해지는 자기파괴적 폭력 끝에 그게 바로 어리석은 사랑이었네 한탄하는 가련한 우리 인간을 이 영화는 참으로 지독하게 표현해냈다.
멜로의 전제인 인간의 고독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랑의 어긋남과 기대의 실패가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정말 솔직하게 새로운 언어와 장면들로 보여진다. 그걸 지켜보는 게 사실 너무 힘겹지만, 정말 내가 철저히 혼자라고 느껴질 때 이 답답하고 우직한 영화가 오히려 큰 위로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때 다시 찾아서 꼭 볼 것만 같은 영화 <무뢰한>이었다.
덧) 오승욱 감독과 전도연 배우가 다시 만나 새로운 영화, <리볼버>를 만든다고 한다. 환상의 콤비가 매번 성공할 거라고 설레발 치는 건 금물이지만 그래도 너무 너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