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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이 Feb 25. 2024

버려야 할 것들

설렁탕이 내게 알려준 것들


집안 정리.

해가 바뀌면 해야 할 일 중 항상 적어두는 것이다.

하지만 새해가 지난 지 한참이지만 나도 모르게 쌓인 물건들과 쓰지 않고 박혀있는 물건들의 생사여부와

이들의 존재 가치에 대해 논할 틈이 나지 않았다. 그들을 내 공간에 두었을 때는 분명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신년은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씨들이 속속 들어차있는 계절이다 보니 창문조차 열어 젖히기가 쉽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내 몸 하나도 유연하게 움직이기 힘들어지고 아침이 되어도 깜깜하기 일쑤니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겨울은 내 직업 특성상 짧긴 해도 방학이라는 특수가 있는 시기이다. 그렇기에 계획한 일들을 계획적으로 할 수도, 쉼을 가진다는 합당한 이유로 미룰 수도 있는 때이다. 그런데 오늘의 글감이 버려야 할 것이라니. 거참. 왠지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따뜻한 음료를 손으로 감싸 안고는 눈을 휘이휘이 돌려가며 고개를 이리저리 꼬아가며 집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나의 데스노트에 적히기 싫기라도 하듯 기억나는 놈들이 없다. 이런.  그러다 작년에 친구가 건네준 설렁탕이 생각났다. 친구는 실온 보관이니 편하게 두고 먹으라 했지만 의심 가득한 마음으로 받자마자 냉장고 신선칸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렇게 곱게 모신 놈이 해가 바뀔 때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문득 생각났다. 그나저나 이 사건은 친구한테 미안한 일이다.

옳거니!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는 낚싯대로 월척을 잡듯 힘차게 집어 들었다. 나의 예상대로 작년 11월로 생을 마감한 놈이다. '그래 이거라도 일단 버리자.'라고 생각하며 가위로 윗부분을 도려내어 싱크대로 버리려는 순간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졌다. 실온 보관이라 해서 당연히 국물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야들야들하게 저민 고깃살과 하얗고 보드라운 연골 비스므래한것들이 가득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서 안전한 저장식이 많다고는 하지만 버려지는 음식들을 보며 께름칙하기만 했다. 이런 내 생각과 달리 다시 한번 이 사건은 내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다 문득 음식이 왜 이렇게 버려지게 된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난 처음부터 이 설렁탕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실온 보관 가능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건강식이 아니라는 편견이 있었고 그렇기에 건더니는커녕 분유와 같은 뽀얗다 못해 느끼한 국물만 있다고 지레 짐작했다.

그러니 냉장고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이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은 나의 편견으로 인해 아까운 음식 하나가 쓰레기로 변한 것이다.  이런 불손한 마음으로 친구의 마음을 받은 건 아니었는데 결론적으론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네고 싶어 진다.  


집안정리로 시작해 유통기한 지난 설렁탕하나 버렸을 뿐이지만 나는 내가 가진 편견과 고정관념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어디 이것뿐이랴. 길거리를 지나가다 스쳐가는 누군가를 보며 갖는 생각들 속에서,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와 짧게 나누는 대화 속에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상대방의 행동을 볼 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을 때조차 내가 갖는 못된 편견과 잡스러운 생각들이 보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대상에 대하여 판단을 중지하는 일을 일컬을 때 ’ 에포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한때 나 역시 누군가의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힘들고 지친다고 아우성칠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 역시 짧은 순간도 에포케 할 수 없는 나약한 사람임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에포케 할 수 있다면 나도 나와 관계하는 다양한 타인들도 서로가 마음속에 버려야 하는 많은 상처들이 쌓이지 않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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