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독려 순례길 여행 - 응답한다1988 19
아침부터 사진을 찍는 일은 흔하지 않은데 오늘은 아침 알베르게 앞에서 여섯 명이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해인이가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추억으로 남기고자 성균이형이 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해인이 뿐만 아니라 많은 순례자들이 부르고스 - 레온 구간을 걷지 않고 기차, 버스를 이용해 건너뛰곤 한다. 순례자들끼리는 순례길 일정 구간을 걷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현대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는 것을 '점프'한다고 말한다.
많은 순례자들이 왜 이 구간을 걷지 않고 '점프' 하냐면 바로 악명 높은 '메세타'가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북쪽에 위치한 순례길 프랑스길은 때로는 산을 넘고 때로는 도로를 오르락내리락 걷는 길인데 메세타는 이와 다르게 경사가 심하지 않은 평평한 고원이다. 오르막길이 없다시피 하니 순례자들이 좋아할 만도 하지만 악명 높은 이유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여름에 정말 덥다. 주위가 탁 터져 있는 들판이고 나무가 많지 않아 그늘이 없다. 두 번째로는 반대로 겨울에는 엄청 춥다. 세 번째로는 정말 재미없다. 메세타 지역은 고원이 꽤 길어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마을 간 거리가 길고 주위에는 온통 넓은 들판과 하늘뿐이다. 길 자체는 평탄하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파른 산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순례자가 원하는 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르막이 없으면 내리막길도 없어서인지 정말 밋밋한 길이다. 마치 삶 가운데서 아무 일 없이 고요한 순간이라고 할까나?~
삶에서 역경을 만나 고난에 처했을 때는 햇볕이 쨍쨍하고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을 걷는 것과 같고 일이 술술 잘 풀릴 때는 바람 솔솔 부는 시원한 날씨에 내리막을 걷는 것만 같다. 평소에 사건 사고 없는 평탄한 길을 원하면서도 막상 아무 일이 없으면 심심해서 따분하기도 하다. 계속 걸으면 걸을 수록 인생이 길과 같이 계속 걷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나는 메세타가 정말 듣던대로 그저 악명 높은 길인지 아니면 나에게는 걷기 좋은 길일지 궁금했다. 해인이와 작별인사를 한 후 우리는 부르고스 도심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과 정신의 방
도시를 빠져나와 도로를 지나 드디어 메세타 고원에 이르렀다. 이제서야 스페인 날씨 답게 따뜻한 햇빛이 우리를 비쳐줘서 어느새 추위는 잊었고 이제까지 걸었던 길과 다르게 평탄한 길이라 걷기 쉬웠다. 하지만 금새 덥기 시작했고 주위에 나무도 없어서 제대로 쉴 공간이 없었다. 부르고스에서 만났던 그 많은 순례자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볼거리도 그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구름 뿐이었다. 가도 가도 그저 윈도우 바탕화면과 비슷하게 생긴 풍경뿐이었다.
충만 : 우리 이제얼마나 걸었지?~꽤 걸은거 같은데
준택 : 아직 30분 밖에 안걸었어요 한 10km는 더 걸어야 할 거 같아요
부르고스 부터 다음 마을인 타르다호스(Tardajos) 까지는 대략 11.5km 걸어서는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메세타는 마치 만화드래곤볼에 나오는 '시간과 정신의 방'과 같았다. 1시간을 넘게 걸은거 같은데 막상 시계를 보면 30분도 채 걷지 않았다.
존중과 배려
지루한 길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 같이 걸어서 지루함이 덜했다. 만약에 메세타를 혼자 걸었다면 심각하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지쳐서 안고 또 다시 걷다가 내가 왜 여기있는지 삶은 무엇인지 고민하며 걸었을 것 같다. 가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해 혼자 걷는 이들도 있다. 나의 경우는 같이 걷다보면 나란히 걸을 때도 있고 또 속도가 달라져 먼저 걷거나 뒤쳐지며 따로 몇 걸음 떨어져 걸을 때가 있는데 그 때 혼자만의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다섯명이서 걷다보니 다 같이 나란히 이야기하며 걸을 때도 있었고 두 세명씩 함께 걸을 때도 있었고 또 일렬로 띄엄 띄엄 한 줄로 걸을 때도 있었다. 다섯 명의 케릭터를 선택하는 게임 '롤'처럼 여러 조합이 나왔고 그 때마다 주제는 다양했다.
우현이와 함께 이야기 할 때는 스페인 역사와 언어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쉬운 회화를 자주 물어봤고 종원이에게는 워킹홀리데이와 남미 여행이야기 준택이는 창업 이야기 성균이형한테는 사회생활과 미술 등 각종 다양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한 명 한명에게 배울 점들이 많았다.
그렇게 우리만의 메세타를 나름대로 즐기면서 걷고 있었는데 순례길에 관한 인터넷 카페에서 우현이가 메세타를 '시간과 정신의 방'이라고 쓴 글에 댓글이 달렸다. 댓글에는 자신은 메세타를 걸으면서 고독을 즐기고 자신과 대화하며 즐거움을 느꼈다고 지루함을 느꼈다고 쓴 우현이의 댓글을 저격하는 글이었다.
그 글쓰신 분이 느끼신 감정과 그분이 걸었던 길을 존중하지만 사람은 모두 다르다. 이 길을 걷는 이유도 느끼는 것도 사람들의 삶도 하나부터 열 까지 다 다른데 막상 그 분은 다른 사람의 길을 존중하지 않아서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