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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자따봉 Oct 04. 2023

D+2 송이의 세상은 새벽에 열린다


오늘은 고요하게 하루를 마무리한 날이었다. 조용히 책을 읽다, 송이에 대한 일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하루의 경계가 넘어있었다. 오늘 하루 참 잘 보냈다,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날이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지라는 다짐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원래 이 시간에 침대에 누우면 잠이 오지 않아서 한참을 뒤척거리다 자곤 했다. 자취생에게 새벽 1시란 13평이라는 공간에 나 혼자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뼛속 깊숙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원래 산다는 게 그런 거 지라며  의미 없이 핸드폰을 만지다,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을 보고 억지로 눈을 감는 평범한 백수의 삶을 살고 있었다.


지난주와 같은 새벽 1시였지만, 건너 방에 송이의 존재만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5kg의 작은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이상 새벽이 외롭지 않았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려고 하던 중, 빗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들렸다. 토독, 토독. 얼핏 들으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하루종일 옷장에 숨어만 있던 송이가 세상을 탐험하기 시작한 소리라는 것을.


더위를 식히고자 틀어놓은 선풍기마저 끄고, 온 신경을 소리에 집중했다. 송이가 사료를 먹는 소리, 급하게 물을 들이켜는 소리, 발바닥으로 모래를 덮는 소리. 고막을 두드리는 자극들에 이름을 붙이며, 송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했다.


옆 방의 소리가 다 들릴만큼 고요한 밤이었지만, 송이가 내는 소리들로 방안은 온기가 가득 찼다. 하루종일 밥을 먹지 않은 송이로 인해 딱딱하게 얼어붙은 걱정들이 온기에 녹기 시작했다. 송이가 남기는 흔적들을 되짚으며, 내가 끌어안고 있었던 불안도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러다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북북북북. 신이 난 송이가 스크래쳐를 긁는 소리였다. 이제 송이가 드디어 마음이 풀렸다 보다. 그렇게 송이의 세상은 새벽에 열렸다.


안타깝게도 송이의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새벽 4시쯤,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어 진 나의 소리로 인해 송이는 황급히 마음의 대문을 걸어 잠갔다. 그 뒤로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소리를 기다렸지만, 한번 걸어 잠긴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지만, 사흘 만에 겨우 만들어진 송이만의 시간을 깨뜨린 것 같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언제쯤 다시 송이가 탐험을 시작할까 기다리다, 까마득이 잠에 들었다.




원래 오후 12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일어나던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눈이 번쩍 떠졌다. 오늘은 드디어 송이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또 똥도 잘 싸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송이의 방을 열었다. 송이가 좋아하는 참치 캔에 스리슬쩍 영양제를 넣었는데, 그래도 잘 먹은 것 같았다. 그런데 물에 이상한 가루들이 떨어져 있었다. 이게 뭐지? 한참을 생각하다, 초보집사의 실수로 인해 송이가 고생한 흔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에 타지 않고 그대로 뿌려둔 영양제 가루들이 입에 닿아 송이가 깜짝 놀랐단 모양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참치를 한 입 먹었는데 이상한 맛이 나서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을 송이를 생각하니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났다.


오늘은 똥을 쌌을까? 복권을 긁는 마음으로 삽을 들어 화장실 모래를 뒤졌다. 한쪽 구석에서 커다란 감자가 나왔다. 일단 오줌을 싸는 건 성공! 그렇지만 아무리 모래를 파헤쳐도 똥은 나오지 않았다. 아쉽게도 오늘은 여기까지 만 인 모양이었다. 왜 송이가 똥을 싸지 않았을까 검색해 보니, 모래가 적어도 손가락 깊이만큼은 있어야 고양이들이 편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고야, 화장실이 영 시원치 않은 덕에 송이만 고생했구나. 두부 모래를 한 팩을 더 뜯어서 양껏 부어주었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는 내일 아침이 되어봐야지 알겠지.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만큼, 송이에게도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송이가 먹고 남긴 건사료는 다 버리고, 새로운 사료를 채워주고 물도 신선한 물로 갈아주었다. 어제 먹고 남긴 것을 감안해서 오늘은 조금만 덜어주었는데, 과연 낮에 송이가 사료를 먹을지는 모르겠다. 오늘도 아마 하루가 다 지나, 새벽이 되어야지만 밥을 먹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먹지 않는 송이의 시간만큼 마음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데, 나도 송이에게 적응하고 있나 보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하루종일 집에 있는 날이었다. 몇 달 전 계단에서 접질렸던 발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상태를 보더니 냅다 깁스부터 채우셨다. 그 덕에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송이도 내가 나가야지 조금 편할 텐데, 아쉽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송이가 있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잘 참았는데, 하루종일 집 안에 있으니 송이를 보고 싶어서 마음이 들썩거렸다. 송이가 옷장에 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송이의 상태를 확인해 보겠다는 핑계로 방 문을 열었다. 그 이후로도 송이의 방문은 간간히 열리고 또 닫혔다. 한 번은 밥을 잘 먹었는지 확인하겠다는 이유였고, 다른 한 번은 화장실을 사용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마음 편하자고 붙인 이유들이었지만, 누군가 나에 '왜 송이 방을 들어가서 애 불편하게 만들고 그래?'라고 묻는다면 당당히 답변할 수 있는 사유들이었다.


물그릇 한번 보고, 밥그릇 한번 보고, 화장실 모래 한번 뒤척거리다 조금 용기를 내어 옷장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옷장에 걸려있는 옷 사이를 열었다. 송이는 가만히 날 보았다.  얼굴을 반만 보여주긴 했지만, 화들짝 놀라거나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저 스윽 옷 사이로 숨어 들어갈 뿐이었다.


무섭지만 무섭지 않으면서도 무섭지만 무섭지 않아 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송이의 모습을 본다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송이는 날 경계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나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낯선 사람은 무서워서 옷가지들 사이로 스르륵 숨었다. 조금 용기를 내어 사진도 찍어보았다. 이동장에서 찍은 사진 이후로 처음 보는 송이의 얼굴이었다.




어제 나와 눈을 마주친 송이의 눈동자는 파들파들 떨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표정이 좋아 보였다. 송이도 이제는 옷장 안을 파악했는지, 옷장 뒤에 구석으로 더 숨을 수 있다는 사실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무서웠는지 얼굴을 다 보여주지는 않고, 반 정도는 옷 뒤에 숨어 나를 지켜보았다. 크게 놀라거나 도망가지는 않기에, 핸드폰의 각도를 틀어 얼굴이 완전히 담긴 송이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송이는 나를 완전히 피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무서워하지 않지도 않았다. 최선을 다해 도망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가능한 숨어있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표했다. 병원 생활을 겪었어서 그런지, 나를 새로운 간호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끔 들어와 새로운 사료와 물을 놓고 가는 사람을 병원에서 겪었기에 확실히 나를 덜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루 종일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 맞나 싶어 구조자님에게 연락을 했다.


오늘은 또 새로운 걱정 주머니를 들고 온 나에게 구조자님은 정답을 알려주셨다. 송이는 원래 길생활을 하던 아이 었어서 사람을 보면 숨는 것이 일상이었던 아이라서 그렇다고 하셨다. 사람의 손을 한 번도 타지 않았던 아이라는 걸 감안하면, 송이가 굉장히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상황이라고도 해주셨다. 하기야 한 번도 사람과 함께 살아보지 못한 아이가 하루 만에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물도 마신 거면 사실 기적에 가깝도록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 욕심이 고양이에 비해 너무 빨랐던 모양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의 세상에 뛰어들었을 송이를 생각해 보았다. 이동장에 들어가기 전에 하악질을 하던 송이가 생각났다. 우리 집에 와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하악질을 뱉었을 때 송이는 무슨 생각이었을 까. 오자마자 침대를 뛰어다니며 숨을 곳을 찾던 송이. 그런 송이가 이제 밥을 먹는다. 송이는 온 힘을 다해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의 두려움을 참고 밥을 먹는다. 내일의 송이가 오늘보다는 더 평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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