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팔자따봉 Oct 04. 2023

D+4 그저 스으윽 숨을 뿐이지요

불과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고역이었는데, 이제 아침 9시만 되면 눈이 자동으로 떠진다. 원래 늦잠을 자는 성격인지라 조금만 더 자고 싶었지만, '나는 송이 엄마니까!'를 외치며 일어났다. 송이를 데려오고 생긴 긴장감이 삶의 탄성을 유지해주고 있다.


다른 날처럼 밥을 잘 먹었는지 확인하고, 화장실에서 감자를 캐고, 또 물을 갈아주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똥을 싸지 않아 아쉬웠지만, 오늘 새벽이 되면 편하게 볼 일 보겠지 하는 여유도 생겼다. 집사가 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아침에 송이를 챙겨주는 일을 일상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낮 동안 내내 숨어있느라 지금은 밥을 먹지 않지만, 언젠가 송이가 아침에 챙겨주는 밥을 기다리게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송이 물그릇을 갈아주면서 침대를 확인했는데 재밌는 것이 있었다. 침대에 송이 털뭉텅이가 떨어져 있었다. 송이는 하루 종일 옷장에만 있기 때문에 송이의 털만 따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더라도, 많은 집사들이 고양이 털로 인해 고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고양이에 대한 지식으로 존재했던 일이 나에게도 발생했다는 사실에 기뻤다. 아이의 털이 빠졌다는 이유로 감격스러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다른 집사분들은 어이없어하시겠지만, 하루빨리 보통의 집사가 되고 싶어 하는 나에게는 특별한 일이었다. 아직 나에게 집사라는 말은 어색한 단어라서, 다른 집사들에게 귀찮을 법한 일들도 특별하다. 다른 집사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조선시대 부부가 쓴 고전 시가 중에 그런 문장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사랑을 할까요?' 송이는 나의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유명사로 존재한다. 비록 지금 나는 연애를 하고 있어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지만, 송이를 향한 마음은 내가 주었던 어떤 사랑과도 다른 결을 지닌다. 나의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고 다시없을 애정을 다른 집사들도 똑같이 가지고 살까. 세상의 그렇게나 많은 집사들이 이렇게 큰 행복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거칠고 투박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보물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세상이라면, 어쩌면 세상은 살기 꽤 괜찮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다른 날처럼 송이의 상태에 대해서 구조자님께 보고를 드리는 데, 구조자님이 송이가 콧물을 흘리고 있냐고 물어보셨다. 송이가 스트레스받을 까봐 들어갈 생각을 못해봤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다. 내가 송이에게 그렇게 가까이 가도 되는 건가? 물론 나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지만, 감히 그래도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송이의 콧물 상태를 확인한다는 핑계로 송이 방에 들어갔다.


보통 송이하고 이루어지는 만남은 옷장 사이로 잠깐 눈 마주치는 정도였다. 깜빡, 깜빡, 눈을 마주치면 송이는 스으윽 숨곤 했었다. 송이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호사분들로부터 순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정말 순하다. 놀랄 때마다 튀어올라 도망가기는 해도, 한 번도 나를 할퀴거나 하악질 조차 한 적이 없다. 그저 커다란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다, 스으윽 숨을 뿐이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완벽한 집냥이가 된다면, 애교는 없지만 무던하고 순하디 순한 고양이가 될 것 같다. 그 모습은 내가 볼 수 있을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 아쉽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옷장 사이의 옷들 사이로 송이를 만났다. 중간중간에 숨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보였지만 애써 무시한 채 송이를 찾아냈다. 깜빡, 깜빡. 보통 2번의 깜빡임을 하기 전에 나를 피하는데, 오늘은 오랫동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막상 송이가 나를 빤히 보니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했다.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고양이 세계에서 애정표현이라고 하는 눈키스를 열심히 날렸다. 깜빡깜빡깜빡깜빡. 송이는 인간의 재롱에 당황하며 이내 옷장 사이로 다시 들어갔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추석 연휴였다. 오늘따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보통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누워서 핸드폰을 켰다.


예전에는 핸드폰을 켜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이내 핸드폰을 끄고 낮잠을 잤다. 그렇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핸드폰을 켜면 언제나 송이를 위한 가구를 열심히 검색해 본다. 아직 옷장에서 나오지도 않는 송이의 상태에 비하면 시기상조이지만, 그래도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각종 인터넷 쇼핑몰 사이를 헤엄치고 다니며 송이에게 무엇을 사주면 좋을지 찾아다녔다.


그런데 생각보다 고양이 가구는 정말 비쌌다. 고작 13평 밖에 안 되는 투룸에 커다란 캣타워를 놓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캣폴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캣폴의 가격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비쌌다. 차라리 이 가격에는 사람가구를 사는 게 낫겠다 싶어 비슷한 가구를 찾아봤는데 캣폴의 반 값이었다. 혹시나 싶어 고양이 카페에 캣타워 대용으로 어떻냐고 물어봤는데, 택도 없는 질문이었다.


처음으로 모아둔 돈이 없다는 사실이 서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집으로부터 용돈을 받으며 지내고 있어 돈을 열심히 아낄 필요가 없었다. 굳이 돌려 이야기하지 않겠다. 우리 집은 유복한 편에 속하고, 와중에 나는 돈 욕심이 없는 편이다. 꼭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애인과 달리 나는 한평생 반지하 주택에서 살아도 행복하게 사는 성격의 사람이다. 남들은 브랜드 옷을 사입을 때, 중국에서 온 7천 원짜리 티셔츠도 좋다고 입는 성격이다. 그래서 한 번도 돈이 아쉽다거나, 돈이 없어 속상했던 적이 없었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살아왔다.


하지만 송이가 온 이후로 돈의 무게가 한없이 자라났다. 누가 봐도 정말 괜찮다 싶은 캣폴들은 항상 다른 캣폴들보다 적게는 몇 만 원, 많게는 십만 원 가까이 비쌌다. 그 가격에서 조금씩 내려서 검색하면, 가장 이상적인 캣폴에서 딱 그만큼씩 떨어진 퀄리티의 제품들을 마주해야 했다. 사실 지금의 지갑사정을 고려하면 살 수 있는 캣폴은 단 하나도 없었다. 계산기를 한번 돌리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돌아갔다. 송이는 어차피 6개월 있으면 떠나는 데, 이렇게까지 큰 가구를 들일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부터 기왕 사는 김에 가장 좋은 캣폴 사주고 싶다는 저 끝까지. 생각의 끝과 끝에서 '적당히' 괜찮은 캣폴이 없었다. 고양이는 가슴으로 낳아 지갑으로 키운다는 우스갯소리가 더 이상 재밌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송이가 아직 캣폴 근처에도 못 간다는 사실이었다. 송이가 옷장 안에서 숨어만 지낸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이 상황이 씁쓸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송이 방을 갔는데, 견적을 내보니 캣폴은 택도 없는 소리였다. 지금 공간에서 캣폴을 들였다간 송이와 내가 꼭 끌어안고 끼여 살아야 할 판이었다. 아예 살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니까 미련조차 남지 않았다. 고양이 유튜브에 나오는 예쁜 고양이 전용 선반 대신, 크기가 튼튼한 사람 선반 몇 개 놓는 걸로 합의를 봤다. 선반 위에 집에 남는 수면사로 방석을 붙여주면 꽤 괜찮을 것 같았다. 이사 오면서 벽에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아 좋다던 애인은 좌절할 이야기지만, 부족한 통장 잔고를 설득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다.




원래는 밥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기만 해도 소원이 없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무슨 말이냐면, 송이의 순화를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사람하고의 사회성이 생긴다면, 나중에 입양 갈 때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가만히 자고 있던 송이에게는 귀찮아질 소식이지만, 언제까지고 옷장 속 고양이로 살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우선 길고양이 순화에 대해서 한참 찾아봤다. 대부분의 영상들이 '아기 고양이라면'이라는 말로 순화의 가능성을 말했다. 하지만 우리 송이는 스트리트 3년 차 고양이인데 어쩌지,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찾았다. 다른 집사분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니 아이고야 우리 송이는 천사가 따로 없었다. 여태껏 그렇게 귀찮게 굴었는데도 한 번도 나를 할퀴거나 때리지 않았다는 데 감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종잇장 같지 않은 가. 6일 만에 스킨십에 성공한 사례를 보고 슬며시 송이 방에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으윽 숨는 송이의 털을 살포시 만져봤다. 세상에 너무 부드러웠다... 송이는 또 똑같이 (하지만 조금 더 빠르게) 숨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니 오뎅꼬치를 사용해서 스킨십을 시도한다길래 쿠팡에서 낚싯대와 함께 주문했다. 과연 오뎅꼬치가 효과가 있을까? 내일 시도해 보고 후기를 남기도록 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D+3 나는 송이 엄마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