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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자따봉 Oct 05. 2023

D+6 송이는 풀 숲 출신의 고양이었다.

전 날 송이가 이불에 사고를 쳤지만, 다행히 늦은 밤에 송이의 화장실에서 감자를 캘 수 있었다. 두부 모래를 아예 한 팩을 더 뜯어서 부어주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나 싶었다. 송이가 오줌을 싸고 모래로 덮지 않았다는 게 커다란 신호였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일단 이불에 또 사고를 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느라 눈치를 못 챘다. 송이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불에 지도를 그린 것이 아니라, 거친 두부 모래로는 성에 안 차는 풀 숲 출신의 고양이라는 사실을.


덕분에 오늘 아침은 똥과 오줌 테러로 시작했다. 오늘은 별일 없겠지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자마자, 내가 마주한 것은 이불에 놓인 똥덩어리들이었다. 처음에는 똥덩어리들만 보고, 그래 이불에 실수했어도 똥을 일단 잘 쌌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새로 깔아 둔 이불에 송이는 얼마나 두부 모래가 마음에 안 드는지 항의 표시를 남겼다. 진한 암모니아 냄새를 맡자마자 황급히 이불을 걷어내어 제발 아니길 바라며, 침대가 어디까지 젖어있는지 확인했다. 이불 1, 이불 2, 매트리스 커버 1, 매트리스 커버 2, 그리고 피날레로 매트리스까지. 한 번에 5개의 이불을 해 먹은 송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겠는가, 이 또한 집사의 숙명인 것을. 이불 2개, 매트리스 커버 2개를 시키며 미리 방수 매트리스 커버를 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처음 왔을 때 송이가 화장실을 잘 사용했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와중에 매트리스에 묻은 오줌은 냄새가 너무 독해서 도저히 빨아쓸 수 조차 없었다.


[Web 발신] NH카드 1*2* 승인

김*연

95,990원 일시불


새로운 매트리스 결제 내역을 알려주는 카드 문제와 함께, 송이의 이불대소동은 일단락되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송이의 이불대소동이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참 다행이었다. 그래서 오늘부터 송이의 순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길생활을 오래 했어서 사람의 존재를 언제나 위험요소로 인지하는 송이에게 '보호자'의 개념을 심어주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송이 옆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송이를 투명 고양이 취급하는 것이었다.


이불 빨래를 하고 나서, 오랜만에 송이 방에 자리 잡았다. 편히 쉬고 있던 송이에게는 날벼락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에서 보내지만,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에는 늘 (현)송이방 (구)옷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은은한 노란 불빛 아래에서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뜨개질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곤 했다. 오늘은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챙겨 송이방으로 향했다.


매트리스가 없어 딱딱한 침대 위에 엎드려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글을 쓸 때 글의 흐름에 나를 맡긴다. 활자가 이끄는 대로 문장을 써내려 가다 보면, 글이 나에게 끝을 말하곤 한다. 그럼 그때 문장을 마무리 짓고, 결과물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그렇게 완성한 글이 마음에 쏙 들 때도 있고, 아무리 봐도 시원치 않아 결국 지워버릴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번에 쓴 글은 아쉽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글을 쓰는 스타일은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힘을 빼야지 좋은 글이 나온다. 요즘 송이 일기를 쓰며 자꾸 욕심이 나서, 의도치 않게 머리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생각에 쥐가 나서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스트레칭이다. 긴장된 근육을 풀고, 천천히 느긋하게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재미있게도 글은 열심히 쓴다고 잘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구태여 나를 포장하지 않을 때 나온다. 내가 가진 생각들을 억지로 글의 기교에 끼워 맞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갈 때 가장 자연스럽고 괜찮은 글이 탄생한다. 늘 알고 있지만, 글을 쓰다 보면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커져서 지키기 쉽지 않다. 이번에 글이 막힌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매일 같이 글을 쓰다 보니, 머릿속이 활자들로 가득 차 생각할 공간이 부족한 듯싶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글자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자, 지금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자꾸 써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단어들, 나중에 쓰려고 아껴둔 표현들, 어쩌면 진부할지도 모르는 감정들을 모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투리 생각들을 모아 완성된 글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경직되어 있던 생각들도 다시 말랑해졌다. 이제 다시 글을 쓸 준비가 되었다.


어제 발생한 일을 되짚어보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송이와의 이별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눈물이 났다. 그럴 때는 굳이 감정을 틀어막지 않는다. 흘러가는 감정들에 나를 맡기고, 계속 글을 쓴다. 송이를 데려오고 나도 몰랐던 감정들을 마주하고 조금 놀랐지만, 한번 올라탄 흐름에서 떨어지지 않게 매달렸다. 한 차례 다 울고 나서 글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늘 마주한 감정의 파도에 대해 나중에 천천히 분석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노트북을 닫았다.





아침마다 송이가 먹은 그릇들과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한 가지 더 생겼다. 바로 송이의 상태 확인을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냥 눈으로 확인하면 되는 데 굳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송이가 얼굴을 보려고 하면 빠르게 숨어 상태를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직 구내염이 완치되지 않아 늘 혀를 내놓고 있기에, 침 흘리는 증상은 좋아졌는지, 콧물은 흘리지 않는지 체크해야 한다. 어제 찍은 사진에서는 혀가 전날보다 들어가 있길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 여전히 혀는 나와있었다. 집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아프기까지 하니 송이도 참 쉽지 않겠다.


여태까지 송이는 한 번도 나에게 하악질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 처음 나에게 하악질을 했다. 송이는 내가 쓰다듬는 것은 한두 번 정도 허락해 줘도,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큼은 싫어한다. 안 그래도 얼굴을 보여주는 게 부담스러운데, 카메라 렌즈를 자꾸 들이미니 송이도 어지간히 화가 났나 보다. 얼굴을 반쯤 내놓고 경계 태세를 취하다, 내가 떠나지 않고 자꾸 렌즈를 들이밀자 하악질을 했다.


구조자님은 송이가 하악질을 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었는데, 송이는 하악질도 꼭 본인 성격처럼 했다. 주변에 고양이 키우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어서 다른 고양이들이 하악질 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 보통의 고양이들이 하악질을 하면 진짜 매섭게 한다. 한 번만 더 귀찮게 하면 가차 없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다른 고양이들의 하악질에 비해, 송이의 하악질은 솜뭉치로 맞는 기분이었다. 겨우 용기 내어 하악질을 뱉어놓고 이내 내 눈치를 살피는 것까지 꼭 송이스러웠다.


송이의 사진을 통해 알아차린 사람도 있겠지만, 옷장 옆의 수납장에서 두 번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송이를 위해 수직 스크래쳐가 있는 숨숨집을 사줬는데, 아침에 확인해 본 결과 그 숨숨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름 부들부들한 수면사로 되어있고 크기도 넉넉한 2층 숨숨집인데, 송이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숨숨집에 붙어있던 스크래쳐를 잘 쓴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달랬다. 그와 반대로 먼지가 가득 쌓여있을 선반 아랫칸을 새로운 숨숨집으로 간택했다는 사실이 어이없었다. 전에 사준 다른 숨숨집도 마지못해 들어가더니, 대체 송이의 취향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일단 선반 아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오른쪽 선반의 아래 칸을 숨숨집으로 쓸 수 있게 비워두었다.





송이가 이불 테러를 할 때 구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송이의 과거에 알려주셨다. 송이는 여름쯤에 굴다리에서 발견되었다. 구조자님의 밥자리를 찾아 굴다리를 넘어 멀리까지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길고양이 중 수컷은 싸움에서 지거나 아프게 될 경우 자신의 영역에서 밀려나게 된다. 송이도 비슷한 케이스일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셨다. 그때도 송이는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고, 가끔씩 나타나 밥을 먹고 가는 아이였다고 하셨다. 오죽하면 병원에서 처음 송이를 데려올 때 구조자님이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가네"라고 하실 정도였다.


송이를 구조할 당시 송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구내염으로 인해 입에 침을 흘리고 있었고, 그루밍을 못해서 털이 이리저리 엉켜있었다. 이를 본 구조자님이 송이를 구조했고, 다행히 송이는 길에서 죽지 않고 지금 나의 곁으로 올 수 있었다. 밥 자리에서조차 안심하지 못하고 숨어서 먹는 송이의 모습이 송이가 어떤 묘생을 살아왔을지 짐작케 했다. 지금 우리 집에서도 성질 하나 부리지 못하고 조용히 숨어 사는 송이의 성격 상, 험난한 길 생활을 그리 잘했을 것 같지 않다. 아마도 밀리고 밀리어지다, 살기 위해 밥자리를 찾아 돌아다녔을 송이가 그려졌다.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송이는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배웠을까. 송이는 무척 좋아하는 참치 냄새가 나도, 내가 침대에 누워있으면 꼭 숨어서 절대 먹지 않는다. 은은하게 불을 켜두어서 그런가 생각한 적도 있었고, 사람 소리에 익숙해지라고 음악을 틀어두어서 그런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오늘 확인해 보니 둘 다 아니었다. 원래 모든 불이 꺼지고 주변에 조용해질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밥을 먹던 송이가 오늘은 내가 자리를 비키자마자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하루종일 내가 집에 있어 아무것도 먹지 못해 무척이나 배고팠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에도 경계를 놓지 못하는 송이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린다. 13평의 두 방을 자기 마음대로 뛰어다녀도 되는데, 송이는 하루종일 옷장의 옷 사이에 숨어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그런 송이가 안쓰러워서 처음 며칠은 방의 불과 소리를 모두 끄고, 방에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 그제야 조심히 나와 밥을 먹곤 했는데, 오늘은 내가 옆에 있다 보니 움직이지조차 않는다. 길생활을 하는 동안 어떤 사람들을 만났기에 송이가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걸까. 구조자님은 송이가 원래 있던 동네가 길고양이한테 무척 고약한 동네라고 하셨다. 송이는 어떤 일들을 겪었을 까, 상상하는 것조차 가슴이 아파 생각하기를 멈췄다.


건강한 사람의 평균 온도는 36.5도라고 한다. 사람으로 인해 긴장을 놓지 못하는 송이의 벽을 녹이려면 몇 도가 필요할까. 고양이는 사람보다 2도 정도 높다던데, 나는 어떻게 해야 송이가 가지고 있는 상처보다 더 따뜻한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사람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를 다시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까. 나를 활활 태워, 나의 열기로 너의 상처를 녹일 수 있길. 타오르는 열기로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장벽마저 넘을 수 있길, 그리하여 네가 세상의 온기를 느낄 수 있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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