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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자따봉 Oct 05. 2023

D+7 집사가 눈치 없게 방을 안 나간다

아직 송이와 나의 사이는 어색하지만, 송이의 적응을 위해 오늘은 송이 방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원래 늘 잠은 송이 방에서 잤었기에 익숙한 공간이지만서도, 오랜만에 잠을 잔다고 생각하니 무척 어색했다. 혹시 모르니 잠들기 전 송이에게 부탁을 했다. 내일 아침이면 네가 좋아할 벤토 모래가 오니 오늘 밤만 꾹 참고 화장실을 써달라고 했다. 또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우리 송이가 똑똑이 고양이라서 내 말을 들어줄 지도.


송이도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원래 해가 지면 송이 방에도 불을 끄고, 나는 거실에 나와서 송이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준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리 오늘은 인간이 거실에 있지 않고, 혼자 있어야 할 밤에 당당히 노트북을 들고 들어왔다. 하루종일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돌아다녀서, 건너 방에 인간이 있어도 긴장을 풀지 못했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저 인간은 나갈 생각을 안 한다. 안 그래도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어서 불편한데, 오 밤중에 방의 가구들을 뒤집어엎으며 난동을 피우고 있어 쉬지도 못하겠다.


송이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새로운 매트리스를 집 안으로 들이고 나서 한참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래도 옷 사이에 있으니까 움직이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송이가 있는 옷장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죽하면 벽을 타고 들리는 이웃집의 소리가 송이가 내는 소리인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송이와 함께 살기 전에는 새벽 3시까지 재즈음악을 들으며 뜨개질을 하곤 했었는데, 송이가 너무 안쓰러워 오늘은 그냥 일찍 자기로 했다.


우리 집은 반지하라서 방의 불을 다 끄면 새까만 어둠이 찾아온다.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꼭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 무서운 그런 어둠이 아닌, 포근한 이불과 같은 어둠이다. 어떠한 빛도 새어 나오지 않는 까만 이불을 덮고, 이제 잠에 들기로 했다. 정확히는 잠에 들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송이의 적응을 위해 벌인 일인데, 내가 긴장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송이는 소리에 예민해서, 새벽에 한창 자유를 즐기다가도 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쥐 죽은 듯이 숨는다. 또 내가 아무리 자는 척을 해보아도, 어지간한 메소드 연기가 아닌 한 쉽게 긴장을 풀지 않는다. 낮에 불을 다 꺼두고 몇 번 시도했지만, 송이가 움직이기 전에 내가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오늘 밤 송이가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나는 시체처럼 자야 했다. 낮의 송이가 하루종일 소리조차 내지 않고 숨어 지냈다면, 이번에는 내가 은신할 차례였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꽤나 진지했던 나의 결심에 비해, 몸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비장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나에게 가장 익숙한 자세를 골랐다. 26년 동안 거의 비슷한 자세로 잤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웬걸, 5분도 지나지 않아 몸이 저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에 드는 것이 아니라, 긴장으로 인해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송이와 등을 돌린 채 숙면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사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말똥 해진 눈만 깜빡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을 버텼지만, 송이가 있는 옷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송이는 쉽사리 긴장을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이쯤 하면 나도 할 만큼 한 것 같아서 냅다 포기했다. 적당히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어차피 망한 거 나라도 편하게 잠들자는 마음으로 꺼둔 핸드폰 알림도 확인하고,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드디어 아침이 왔다. 송이 아침밥을 외치며 일어나던 다른 날과 달리, 오늘은 과연 오늘도 송이가 오줌 테러를 했을지 안 했을지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눈 뜨자마자 방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방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고, 장판과 이불 모두 무사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삽을 들었다. 과연 송이는 나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줬을까?


비록 풀 숲 출신의 송이에게는 너무 거친 모래였지만, 송이는 꾹 참고 두부모래로 가득 찬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다. 먼지와 가루가 흩날리기로 악명이 높은 벤토나이트 모래로 화장실 모래를 갈아주는 일었다. 그리고 성공적인 모래 갈이를 위하여 미리 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중고거래를 하러 가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고양이는 거친 입자의 모래를 좋아하지 않지만, 편리하기에 많은 사람들은 두부모래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 송이처럼 두부모래를 강력히 거부하는 경우, 고양이에게 최적화된 모래인 벤토나이트 모래를 쓴다. 당장 모래를 어디서 어떻게 사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 구조자님께서 새벽에 카사바 모래와 벤토나이트 모래를 보내주셨다. 카사바 모래와 벤토나이트 모래를 섞어 쓰면 먼지가 덜 날릴 것이라는 구조자님의 조언이 오늘따라 아련했다. 비록 구조자님의 메시지 너머 '쉽지 않을 텐데...'라는 은은한 걱정이 메아리가 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송이 엄마이고 송이의 화장실 갈 권리를 지켜줘야 할 책임이 있다.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새벽에 급히 중고거래를 잡았다. 구매하고자 하는 물건은 고양이 집사라면 모두 알고 있을 아이템인 사막화 방지 매트였다. 처음에 '사막화'라는 단어를 보고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이내 집사들의 감탄에 겨운 후기를 보며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고양이들이 볼일을 보고 나면 모래 가루들이 바닥에 돌아다니는데, 심할 경우 바닥이 사막처럼 변하는 것을 '사막화'라고 불렀다. 하지만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자 아닌가. 집사들은 이 현상을 극복한 새로운 물품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바로 사막화방지 매트이다.


문제는 당장 늦어도 오전이 지나기 전에 화장실 모래를 갈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밤 사이에 송이가 화장실을 잘 썼더라도, 아침에 송이가 사고를 치지 않을지는 또 모르는 일이었다. 구조자님 덕분에 송이의 화장실을 새롭게 채울 모래가 열심히 새벽을 뚫고 달려오고 있지만, 사막화방지 매트를 주문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지금 주문해 보았자, 아무리 빠르게 도착해도 저녁에나 도착했다. 사막화방지 매트 없이 모래만 갈았다간, 서울의 주택에서 사막이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될 수도 있었다.


이때, 나를 살려준 것은 바로 당근마켓이었다. 근처 동네의 물건들을 중고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인데, 판매자와 연락만 된다면, 또 운이 좋다면 당장 오전에 물건을 받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동네를 중심으로 물건을 살폈다. 기가 막힌 우연으로 내가 갖고 싶었던 브랜드의 사막화방지 매트가 저렴한 가격에 올라와있었다. 비록 판매자분은 새벽에 연락하지 말라는 의미로 방해금지모드를 설정하신 것이 보였고, '새벽에 연락하는 것은 매너가 아닐 수도 있어요'라는 메시지가 떴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가 못 되었다. 구구절절 나의 사정을 설명하며, 당장 내일 아침 거래할 수 있느냐는 문의를 띄워 보냈다.


다행히 이른 아침에 거래가 가능하다는 답장이 왔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다리 한쪽에는 깁스를 차고, 한 손에는 감사하다는 의미의 바나나 우유를 들고 거래를 하러 떠났다.




비록 출발할 때는 송이 밥을 챙겨주느라 늦게 출발해서 택시를 타고 갔지만, 올 때에는 돈을 아끼고자 절뚝거리며 버스를 타고 왔다. 내 몸의 절반만 한 매트를 이불처럼 두르고, 집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새벽에 도착한 벤토나이트모래와 카사바모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일단 화장실에 가득 찬 10kg가 넘는 두부 모래를 모두 일반 쓰레기에 버리고, 깨끗하게 닦은 방바닥 위에 사막화방지 매트를 깔고, 벤토나이트 모래와 카사바모래를 화장실에 붓고, 10kg의 일반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을 해야 했다. 이를 해내기 위해선 깁스한 발을 이끌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제 송이의 오줌 테러를 받은 매트리스는 미리 버리고 새 매트리스를 들여놓았다는 사실이었다. (내 키가 158cm인데 220cm 길이의 매트리스를 혼자 힘으로 버렸다. 이것이 바로 집사의 힘이다.)


삽을 들었다. 언젠가 모래 전체 갈이할 날이 올 줄은 알았는데, 그게 3주 뒤쯤일 줄 알았지 당장 이번 주일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난 해내야 했다. 자취생은 볼 일이 없는 10L짜리 일반 쓰레기 봉지에 차곡차곡 송이에게 버림받은 모래를 담았다. 쓰레기 봉지에 모래를 절반 정도 채우고 나니, 이걸 다시 들고 계단을 오를 나의 미래가 그려졌다. 절대 이 이상은 못 든다. 이내 새로운 봉투를 꺼내 남은 모래를 봉투에 담았다.


그 뒤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물티슈로 방바닥을 깨끗이 닦고 (방이 작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로 온 모래를 뜯어 시원하게 부었다. 확실히 비싼 모래라 때깔부터 달랐다. 누가 봐도 '저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기성품이에요'를 외치는 두부모래와 달리 벤토나이트 모래와 카사바 모래는 당장 바닷가에서 퍼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모래가 서울 자취방에서 흩날린다는 것이지만, 사람이 대수인가. 고양이가 중하지.


아무리 힘든 일도 끝은 정해져 있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을 하다 보니 제법 근사한 고양이 모래화장실이 완성되어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니, 그 사이에 새로운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동안 잘 쓰던 안경다리가 부러져있었다. 그래, 송이의 새로운 화장실을 기념하는 의미로 안경도 새로 맞추자. 송이 화장실도 새것, 매트리스도 새것, 안경도 새것.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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