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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Apr 03. 2019

내가 그리고 있는 '어른'의 모습

중년을 준바히며 하는 고민


'다들 잘 지내나?'


가만히 앉아 머릿속으로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러자 덩달아 '커피, 카레, 그리스 음식, 월남쌈, 초콜릿 케이크'가 1:1로 그려진다. 뭔가 싶어 기억을 헤쳐본다. 생각할수록 그동안 내가 누군가와 함께 먹은 음식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음이 명백해진다.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사회인이 된 친구는 취업 턱이라며 커피를 샀다.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그녀의 손에 들린 프랜차이즈 카페 쟁반에는 여러 잔의 커피가 가득 담겨있었다. 당당한 그녀는 맏언니처럼 든든하고 멋졌다. 쌍둥이 육아를 응원해주러 친구 집에 들렀을 때, 친구는 지친 몸으로 뚝딱 카레를 만들어 날 밥 먹였다. 밥때에는 밥을 먹는 거라며 밥 잘 먹고 다니라고 근엄하게 잔소리하고 손에는 아기들이 간식으로 먹던 미니약과를 쥐어주었다. 첫 책을 출간한 친구를 찾아가 사인을 요청하자 친구는 그리스 음식점으로 손을 이끌었다. 그 여름 또 하나의 직업을 갖게 된 멋지고 부러운 친구와 함께 먹었던 짭짤한 음식과 맥주는 잊히지 않을 별미였다. 신혼집 페인트칠까지 모두 남편과 직접 했다는 알뜰한 친구는 새댁의 수줍은 솜씨로 월남쌈과 잡채를 만들어 집들이 음식으로 내놓았다. 무섭게 불어난 잡채 덕에 실컷 웃고 배 터지게 먹으며 나도 나의 신혼을 꿈꿨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주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주눅 들어 울먹이고 있을 때 그분께서는 나에게 커피와 초콜릿 케이크를 사주셨다. 더 좋은 길이 있다. 혜선 씨는 젊다. 잘할 수 있다 하시며 엄마처럼 손잡아 주셨다.




 노르웨이 산기슭에 독실한 교파를 일군 아버지를 두었던 금욕적인, 아름다운 두 자매가 산다. 어느날 바베트라는 여성이 파리 코뮨을 피해 그녀들을 찾아온다. 그날 이후 그 프랑스 여성은 자매들의 일을 거들며 하녀로 지내게 된다. 어느날 바베트는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고, 자매들과 가진 전부를 써 신도들에게 만찬을 대접한다. 식사에 초대되었던 모두 최고의 요리를 맛보며 다시 마음을 열게되고, 자매는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 바베트에게 고마워한다. 

바베트의 만찬/ 이자크 디네센 _노에미 비야무사 그림_추미옥 옮김_ 문학동네


책 바베트의 만찬과 영화 바베트의 만찬의 한 장면


음식에는 마음을 전하는 힘이 있다. 마음을 보듬고 위로해주기 위해, 기쁨을 나누기 위해, 수고로움에 감사하기 위해 음식을 만들고, 먹는다. 내가 떠올린 것 역시 그들의 빛나는 순간과 마음이었다. 다시 되짚어 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음식을 대접했었나!'.


슬프게도 딱히 기억될 만한 것이 없다. 학생 신분일 때가 많았고, 일을 하는 동안에도 유명 강사가 아니었던 터라 주머니 상황이 넉넉하지 못했다. 신세를 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거하게 밥을 사본 일 역시 드물었다. 중국에 살게 되면서 기회 역시 점점 더 줄고 있다.




박사과정 수업을 들을 때 같이 공부하던 연배 높은 선생님들께서는 매번 돌아가며 밥을 사주셨다. 젊은 학생들이 도와주고, 좋은 에너지를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밥을 사주셨다. 송구하고 감사했다. 그때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다. '밥을 사는 일,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마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크게 한턱을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두 손 가득 장을 봐서 손이 불도록 재료를 손질해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것 역시 자신이 없다. 경제적인 상황도, 마음도 정성도 부족하다.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언젠가는 나도 당연히 밥값을 척척 내고, 한번 맛보면 또 먹고 싶어 지는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게 해가 바뀌 듯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밥을 사고 싶다, 거하게. 밥을 해주고 싶다, 맛있게.


 기쁜 일을 축하해주고, 힘든 일을 보듬어 주며 함께 음식을 먹고 싶다. 그것이 내가 그리고 있는 '어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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