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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Apr 03. 2019

외국 살이 팔 할은 짐과의 사투

해외생활, 중국, 육아

중국에 온 지 일 년쯤 됐을 때 내 물건이 너무 없어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원래는 기숙사 생활 6개월을 계획하고 왔기 때문에 장기 여행 수준의 짐을 꾸려왔었고 그 후엔 부족한 건 대충 사고, 한국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옷가지 좀 챙겨 오고 하며 적당히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함의 강도가 세지기 시작했다.


사 먹는 게 질리니 맛있는 반찬이 먹고파 지고, 기분 좋아지는 옷도 입고 싶어 지고, 자질구레해 보이지만 없어보니 불편한 물건도 가지고 오고 싶고, 책도 좀 맘대로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 번은 작정을 하고 짐을 싸는데 책이 무거워서 감당이 안 된다. 그렇게 물건이 필요했으면 수화물 비용을 더 내면 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게 싫었다. 사람마다 아끼는 포인트가 있는데 나에겐 그것이 수화물 추가 요금이다. 공항 가면 기분 낸다고 밥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면세점에서 화장품도 하나씩은 사면서 수화물 추가 비용은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 짐가방의 무게는 23kg을 넘기지 않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고민을 하다 어깨에 메는 가방에 책을 가득 담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기내용 캐리어를 가지고 가면 검색대에서 물건을 다 끄집어내야 해서, 그게 귀찮아서 숄더백을 선택했다. 공항까지는 버스가 데려다주고 공항에 도착하면 수화물 부치고 남은 짐은 공항 트레이에 올려서 끌고 다니면 그만이었다. 10kg이 넘는 짐을 어깨에 두르고 집을 나섰다.


 




  공항까지 오는 것도 좀 힘들다 싶긴 했다. 잠깐 메고 있는 것도 무거웠고 버스 오르고 내리고 여하튼 좀 힘들긴 했는데 공항 트레이를 만날 생각을 하며 꿋꿋이 참아냈다.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이 많다. 유난히 사람 많은 날이 있는데 그날이었다. 티켓 발권하는데도 한참이 걸리고, 검색대 통과하는 것도 세월아 내 월아고. 검색대 통과하기까지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동안 난 온전히 짐을 이고 있었다.


  사색이 되어 간신히 검색대를 통과하고 면세점 어딘가에 널브러져 있을 거라 예상했던 트레이를 찾는데 없다. 진짜 한 개도 없다. 그날은 공항 내에서 셔틀트레인도 타야 했다. 표를 확인할 때 승무원이 얼마나 강조했었던가! "고객님, 탑승하시려면 셔틀트레인을 타셔야 하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트레인까지 거리는 20분 정도 소요됩니다." 시간은 없고 마음은 조급하고. 어쩔 수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안 되겠다 싶어 뛰면서 눈으로는 트레이를 찾았다. 어깨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간신이 트레이를 찾고 짐을 올리면 트레이를 끌 수 없는 엘리베이터가 나오고, 계단은 왜 이리 많고.


  짐을 모시고 오며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했다. 자리에 앉았는데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났다. 사람들 몰래 조금 울다 잠이 들었다. 그 순간이 참 외로웠다.


  중국에 도착해서도 고생은 끝이 아니었다. 입국심사를 위해 끝도 없이 줄을 선 사람들. 오늘 내로 집에는 갈 수 있는 건지. 인파는 공포에 가까웠다. 나중엔 짐을 발로 끌기에 이르렀고,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 짐 뭉텅이를 버리지 않고 온 게 용하다.








  집에 도착한 이후 일주일간 난 앓아누웠다. 몸도 마음도 아팠다. 누군가가 나를 봤으려나? 관심 가지는 이는 없었겠지만 나의 이 무식한 궁상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난 다짐을 했다. 절대 공항 가는 날엔 몸에 짐을 장착하지 않겠다고! 가능하면 손가방 하나로 처리를 하고, 정 안 되겠다 싶을 때는 기내용 캐리어를 사용했다. 그렇게 끌고 다니면 될걸, 왜 고생을 자초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다. 좀 편하게들 사시라고 누군가가 바퀴를 만들었건만 말이다.


  기내 수화물 10여 킬로그램을 포기한다는 건 외국 거주자로서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무게면 옷이 대여섯 벌이든 신발 몇 켤레든 책 10권이든 기타 등등이다. 무게를 포기한 나의 어깨에는 자유가 주어졌고 공항 가는 길은 다시 꽃길이 되었다.


  어느 날 교민 모임이 있던 날, 나는 이 일화를 소개했다. 모두들 너도 그랬냐며 웃고 떠들었다. 나는 이야기의 마무리로 앞으로 아기 짐도 가능하면 가지고 오지 않겠노라고 선포했다. 모두들 코웃음을 쳤다.


  아기를 낳고 첫 번에는 김치를 포기하고 아기 분유와 옷가지를 챙겼다. 결국 우리 집 김치가 매일매일 그리웠다. 김치야 사 먹을 수도 있으니 그렇다 해도 중국에서 아기 용품을 모두 대체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국에선 한국에서 사용하던 물건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그보단 수입 물품의 경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선뜻 내키질 않았다.

다행히 이웃분들의 도움으로 아기 물품은 꽤 많이 쟁여놓게 되었지만 우아하게 짐을 포기하겠다던 나의 선전포고는 지켜지기 힘들게 되었다.


  주재원으로 발령받는 경우 회사에서 이사비용이 지급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원한다면 국제 이사를 할 수도 있다. 비교적 먼 나라는 아니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이삼백만 원을 지불하면 내가 쓰던 물건을 중국에서 그대로 쓸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사를 하자니 그것도 번거롭고 필요한 물건은 그때그때마다 다르니 이사를 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다시 어깨를 준비하는 중이다. 아직까지 유유히 면세점을 방랑하는 이이기를 바라지만, 이제 면세점은 마트보다 조금 비싼 물건을 파는 생필품 판매소가 돼버렸다. 짐과 친해지기 위해, 뭉텅이가 아니라 행복 꾸러미로 바라볼 수 있도록 바퀴가 네 개 달린 기내 캐리어를 끌고, 힘이 들 땐 비교적 사람이 적은 김포공항 도착 항공편 선택을 하고, 덜 걷기 위해 셔틀트레인을 타야 하는 항공인지 확인을 하고, 부칠 수 있는 수화물이 2개가 되는 항공사 행사 기간이 언제인지 알아보고, 방학과 명절이 있는 달은 가급적 피하고, 계획된 한국행이라면 미리미리 발권을 해 아기 바구니를 신청한다. 이리저리 꾀가 많아진다. 다 살게 되기 마련인 것 같긴 하다. 신기한 노릇이다.


그렇게. 오늘도 항공편 확인을 하며 열심히 근육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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