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혜선 Apr 03. 2019

일상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물건들이 주는 위로'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남편이 두통약을 찾는다. 매번 묻기에 자주 찾는 약은 소파 앞 테이블 아래 뒀는데 못 찾기는 매한가지다. 살뜰한 부인이 되고자 약과 물을 가져다주니 약은 한 곳에 두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내가 먹기 위해 사 온 약이 대부분이라 본인이 정리하기에는 애매했던 모양이다. 말이 나온 김에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곳저곳에 두었던 것들을 꺼내 한 곳에 모았다.


  약은 누가 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많았다. 양으로만 봐서는 집에 중병 환자가 있을 법했다. 우선 유통기한부터 확인했다. 급할 때는 기한이 지난 약도 먹곤 했는데 그러다간 언제가 탈이 나지 싶어 미련 없이 버리기로 했다. 희미하게 적힌 숫자들을 확인하며 이런 것들을 왜 여태 끼고 살았나 싶다. 날짜가 지나도 한참이나 지났다. 2015년, 2016년까지가 기한이었던 것들이 많아 2017년은 양호한 축에 낄 정도다. 버리는 것 을 왼쪽,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오른쪽에 둬 보니 왼쪽의 지분이 훨씬 많다. 스스로도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 남편이 보기 전에 얼른 버리려고 쓰레기통에 욱여넣었다.


  이 오색찬란한 알약들은 2015년부터 나와 함께 차근차근 입국 수속을 밟았다. 중국에 오는 첫해는 스트레스성 위염과 알레르기로 고생을 해서 약이 필요했었다. 위장약과 알레르기약이 봉지로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중국에 와 보니 온도와 습도가 맞지 않아 감기로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이 더해졌다. 그리고 이후 3년 여간 귀국과 입국을 반복할 때마다 상비약을 준비했다. 첫해에만 적응하느라 좀 골골했지 이후에는 별 탈이 없었는데도 중국에 오기 전에는 으레 약국에 들렀다. 종합 감기약, 알레르기약, 목감기약, 콧물감기약, 해열제, 두통약, 지사제, 인공눈물 그리고 가끔은 파스, 모기약 등을 비상약 명목으로 구입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한 번에 오만 원 이상씩은 결제를 했던 것 같다. 조금씩 모아왔던 것이 상자 한가득이 될 정도로 쌓이게 된 것을 보며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순수 박물관/ 오르한 파묵_이난아 옮김_민음사


터키의 상류층 남성인 케말은 약혼을 앞두고 미인대회 출신의 사촌 여동생 퓌순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퓌순과도 사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케말의 약혼식 날 퓌순은 사라지고 주인공은 뒤늦은 후회를 하며 어렵게 퓌순을 찾는다. 퓌순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라 영화 제작으로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부유한 친척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8년간 그녀의 집에 드나든다. 그리고 퓌순의 물건을, 박물관에 전시가 가능할 정도로 많이 수집한다. 퓌순의 작은 물건들은 케말에겐 곁에 둘 수 없는 그녀의 존재 대신인 동시에 그녀가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달래주는 위로의 물건이었다. 약을 정리하며  상비약의 타이틀을 단 종합 감기약은 나의 불안함의 발현이자 불안함을 달래주는 물건이었음을 알게 됐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 남편은 원래 약 먹기를 싫어하는 편이고 건강한 체질이라 두 세알 정도 먹은 게 다이고, 나 역시 근 일 년  간 단 한 번도 약 먹을 일이 없었다. 결국엔 남편이 큰 봉지에 가득 담겨 버려지는 약들을 보았다. 그게 다 버려지는 거냐고 물으며, 몇 십만 원어치는 될 것 같다고 비죽댄다.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나의 아둔함이 창피해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양이 준 약들은 작은 상자에 가지런히 담겼다. 한눈에 구별할 수 있게 됐으니 이제야 비상약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거다. 몇 만 원의 상비약으로 타국 생활의 걱정과 두려움을 약간은 해소했으니 나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약이 줄어든 만큼 불안함도 덜어졌기에 그동안의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때로는 일상의 불안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할 만큼 커지곤 한다. '걱정하지 말라'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면 불안을 달래줄, 일상의 물건 몇 개쯤을 머리맡에 두어도 좋을 것 같다. 누가 뭐래도 "물건들이 주는 위로"는 분명 존재하니 말이다.







* "물건들이 주는 위로"는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의 목차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언제나 갖추고 있던 불안함의 발현, 종합 감기약ㅍ 


언제나 갖추고 있던 불안함의 발현, 종합 감기약

작가의 이전글 외국 살이 팔 할은 짐과의 사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