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혜선 Sep 17. 2022

패키지 여행이 보상해 줄 수 없는 것

체코, 패키지 여행의 기억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9일 동안 여행하는 패키지여행의 첫날, 11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인솔자님의 안내에 따라 일행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대기 중이던 대형 버스에 올랐다. 외국에 온 것을 증명해 주는 공항의 커다란 프라하 글자가 멀어지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첫 일정은 프라하 야경 투어였다. 버스가 들어설 수 없는 지점이라는 설명을 듣고 내린 곳에서부터 일행들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길을 만들어 내는 바닥의 짙은 회색의 단단한 돌은 색과 질감이 낯설어서인지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오가며 이 길을 만들어 냈을까?

프라하의 첫 느낌은 동유럽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와 비슷하게 약간은 어둡고 무거웠다. 그 차가운 기운 때문이었는지 옅은 주황빛 아래 상점들의 자태가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매일 수많은 관광객으로 짜증이 날법도 한데 경적 한번 울리지 않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위해 거북이 주행하는 차들도 신사적으로 보였다.

걷다 보니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다리인 카를교에 다다랐다. 블타바강 위의 석조 다리는 소문대로 아름다웠고 다국적 관광객들의 들뜬 눈빛과 목소리가 그곳이 세계적인 관광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솔자님은 다리의 역사와 석조상에 대해 진지한 설명을 해 주셨지만, 과거의 이야기는 노래처럼 흘러갔고, 눈앞의 것들만 사진으로 남았다.


카를교를 건너 구시청사의 명물인 천문시계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계를 향해 고개를 들고 구름처럼 몰려있었다. 1410년에 만들어진 천문시계는 매 시각 정각이 되면 목각으로 만들어진 해골이 줄을 당겨 종을 울린다. 그러면 기타, 지팡이, 거울을 든 조각상이 고개를 내젓고, 시계 위 창문에서는 십이사도 상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황금 닭이 홰를 치면 짧은 공연이 마무리되는데 이것은 죽음 앞에서는 욕심과 증오는 덧없지만, 닭이 새벽을 깨우듯 삶은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라고 했다. 분위기에 맞게 설명은 진지하게 들었지만 30초 남짓 되는 공연은 일행을 허무하게했다. 더욱이 그마저도 많은 사람 틈에서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쉽기만했다. 그러자 인솔자께서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곳은 마지막 날에 다시 오게 되는 곳입니다. 일정이 겹치니 그때 한 번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주변도 너무 힘들여 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또 오게 된다는 확신의 말을 안전을 위탁하고 있는 권위자에게 전해 들은 후 일행의 발걸음은 한결 느려졌다. 바삐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한편에 앉아 세계 각 곳에서 온 관광객들을 지켜보는 분들도 계셨고, 익숙하게 핸드폰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나와 남편은 보는 것 대신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여행 인증에 열을 올렸다. 프라하의 10월은 생각보다 쌀쌀했고, 첫날의 여행은 고됐는데 ‘다시 한번 더 올 수 있다는 기회를 접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8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첫날 발 디뎠던 프라하 구시가지에 가는 날이 되었다. 전날은 헝가리 일정이었기 때문에 부다페스트에서 프라하로 가기 위한 거점 체코 브르노 지역의 호텔에서 투숙했다. 브르노는 체코 제2의 도시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호텔 창 풍경은 마트와 공장으로 보이는 멋없는 네모반듯한 건물 한 채가 전부였다. 패키지여행에서 비용 절감을 위한 외곽의 호텔이었겠다는 생각으로 아침에는 조식을 먹고 미련 없이 차에 올랐다. 부르노에서 체코의 수도 프라하까지는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이어폰을 꽂았다.


깜빡 졸다 잠이 깼는데 차가 멈춰있다. 차는 시동까지 꺼진 상태였다. 반쯤 뜬 눈으로 창밖을 보니 남자들이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담배도 피우고 볼일도 보고 있다. 사고가 나서 정체 중이라는 안내를 듣고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책도 보고, 잠도 자고, 남편하고 이야기도 했건만 차가 멈춘 시간은 한 시간은 두 시간을 지나 다섯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고가 나도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이동하는데 체코에서는 정말 차가 그 자리 그대로 멈춰있었고, 동유럽 여행 한창 성수기 여름철에 도로에서 4시간까지 갇혔던 경험이 있다는 인솔자님의 기록은 이미 깨진 상태였다. 일행은 처음에는 남은 관광이 가능하겠느냐 물었고, 그다음에는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것이냐 물었고, 최후에는 공항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차가 멈췄을 때는 상황을 물었고,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는 상의했고, 그다음에는 신경질을 내고 최후에는 화와 분노를 쏟아냈다. 전날 오후부터 이동하며 차에서 시간을 보냈고, 거점 브로노에서는 호텔 안에서 잠을 잔 것밖에 한 일이 없으니 시간을 헛되게 보냈다는 생각으로 화가 더 나는 듯했다. 밥이 중요한 이, 밥보다는 프라하성이 중요한 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이. 모두의 요구와 상황은 달랐다.


우리 부부는 일행 중 나이가 가장 적었고. 뒷자리였고. 또한 다음날 날 여행 일정이 남아있어서 나름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좁은 버스에서는 머리 아픈 많은 말들이 오갔고 목소리와 억양에는 인솔자를 향한 의심과 적의가 가득했다. 9일간의 우정과 고마움은 모조리 사라지고 계약 관계만이 남아있었다. 한참 고성이 오가던 중 중간 자리 어디쯤에선가 나직한 혼잣말이 들렸다.

   

"사람은 안 다쳤다는가... 죽지는 않았다는가..."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즐겁기 위해 온 곳에서, 어쩌면 다시 못 올 나라의 고속도로에서 7시간을 꼼짝 못 하고 있으면서 배가 고프고, 화장실이 가고 싶고 남은 여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에 화가 나는 지경에 누군가는 사람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겨우 공항에 도착해 귀국 준비를 했다. 다시 온다던, 그때 다시 보면 된다던 그곳은 가지 못했고 프라하성 역시 방문하지 못했다. 운이 좋은 이는 운이 좋은지를 모른다고 했었나. 그동안 한 번도 기상악화나 현지 상황으로 패키지 일정이 어긋난 적이 없었기에 처음 경험해 보는 그날의 기억은 진하게 남았다. 패키지여행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일정 변경을 보상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겨누어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보다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행 후 몇 년 뒤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체코 여행 영상을 보게 됐다. 여전히 천문시계 앞에는 관광객들이 빽빽이 몰려있었다. 프로그램에서는 내레이션으로 천문시계의 역사와 의미를 소개하고 시계 작동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익숙하게 인터뷰가 이어졌는데 상기된 표정의 외국인 관광객이 말했다.     


“이걸 보러 여기에 왔거든요.”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30초 남짓 되는 퍼포먼스가 누군가에게는 다른 나라에 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곧이어 화면에 프라하 성채 단지 안에 자리 잡은 <성 비투스 대성당>이 비쳤다. 내가 갈 수 없었던 그곳은 화면으로 보기에도 압도당하는 느낌이었고, 성당의 내부는 알폰스 무하의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눈부시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우리 여행의 일행 중에 노년의 화가분이 있으셨던 것이 떠올랐다.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 분인지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우연히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다정하고 친절하게 신혼여행을 축하해 주시던 모습도 덤으로 떠올랐다.


꽉 막힌 남의 나라 고속도로 버스 뒷자리에서 표정 모를 많은 목소리를 들었었다. 목소리에 대해 참을성 없고, 점잖지 못하다고 평가 절하했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프라하성을 보기 위해 그 먼 곳에 와서 마지막 일정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바라던 것을 눈앞에서 이루지 못하는 마음을 표현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 기준으로 그분들을 평가한 것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이, 11시간 비행기를 타고 체코에 온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바라고 바라던 일생의 한 번의 일일 수도 있다. 나 역시 ’내가 다시 체코에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본다면 미지수다. 지금의 여건을 생각해 본다면 가지 못할 확률이 더 높다.

신혼여행을 준비하며 그저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여행지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하지 않았었다. 고대했던 일, 오랫동안 바랐던 일이 그리 허무하게 눈앞에서 사그라진다면 나 역시도 분노섞인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천문시계는 매 시각 정각,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알린다. 덧없지만 살아가야 하는 삶에서 각자가 살아왔고 살아갈 길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가볍다는 것, 중요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판단할 수 없다. 그날 꽉 막힌 도로에는 어떤 사고가 있었던 것일까.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마주 보고 있던 인솔자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뒷모습만 보아야 했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버스 안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오래전 체코에서의 마지막 날을 생각해 본다.     



관광버스 안에서 바라본 정체된 체코 고속도로의 모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