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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Sep 19. 2022

"하늘의 여권 따기"였던 나의 첫 여권

2006년 어느 신문의 헤드라인 "하늘의 여권 따기"

대학 시절 해외에 다녀온 경험을 자주 이야기하던 친구가 있었다. 자주라기보다는 끊임없으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는데 친구의 목적은 과시가 아닌 권유였다.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를 눈으로 보고 느끼며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여행의 즐거움을 줄기차게 늘어놓았다. 당시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이 유행이었지만 첫발을 내딛지 못해서인지 영 관심이 가질 않았고 딱히 해외에 나갈 계기도 없었다. 그 성실하고도 질긴 설득 때문이었는지 졸업을 앞둔 시점 문득 ‘내가 해외여행 가고 만다’라는 오기가 생겼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 알아보니 늦어도 새벽 6시에는 담당 부서에 도착해 번호표를 뽑아야 했다. 사진을 여권에 붙이는 방식 대신 위조와 변조 방지를 위해 사진을 여권에 인쇄하는 전사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이에 따라 신청자가 늘었고 이전 방식보다 여권 접수와 발급에 드는 시간이 길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이에 더해 “수출로 번 돈 해외여행 다 까먹어”라는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여러 경제 여건과 주 5일제 시행 등의 요인이 맞물리면서 해외여행 붐이 일어나 여권이 필요해진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여권 발급을 “하늘의 별 따기”로 비유하며 민원인들의 줄 서기 모습을 촬영하고 기자는 앞줄에 서 있는 대기자에게 몇 시부터 줄을 섰는지 연신 물어 기사화했다. 여행사는 이런 시류를 이용해 기존 여권 대행 발급 수수료의 3배가 넘는 금액을 비용으로 측정했고, 10만 원 이상을 지급하면 3일 안에 여권을 발급해 주겠다며 급행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행사를 통해 수고를 더는 방법도 있었지만, 식구 수대로 계산해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아 여권 발급에 도전했다.


거주하던 시에는 발급기관도 많지 않아서 집에서 관공서까지 가려면 30분 정도 더 서둘러야 했다. 택시에서 내려 후다닥 달려갔지만 까만 하늘 아래 이미 사람들은 건물 밖까지 줄을 서고 있었다. 이렇게 고생하는데 번호표도 뽑지 못하면 어쩌나 얼마나 마음을 졸였나 모른다. 나의 목적은 4개의 여권을 손에 쥐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간발의 차로 허탕을 치는 날도 있어 몇 날을 고생해 서류를 작성하고 접수해 10여 일 만에 여권을 손에 쥐었다. 부모님과 동생의 여권을 펼쳐두고 한동안 오래오래 뿌듯해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증빙이 있는 효도를 한 날이기도 했다. 그 여권으로 우리 세 모녀는 태국 방콕으로 첫 해외여행을 했었고, 여행 내내 여행 책자에 적힌 대로 복대 속에 여권을 감추고 얼마나 애지중지 여겼는지 모른다.


출산하고 아이가 50일쯤 되었을 때 아이의 여권을 만들기 위해 사진이 필요했다. 사진관에 문의해 보니 유아는 사진관에서도 사진 찍기가 힘드니, 집에서 찍은 후 사진관에서 배경을 보정하는 방법을 추천해 주셨다. 그리고 배경색과 겹치면 안 되는 흰색 옷을 제외한 옷을 입고 귀가 나온 정면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주의 사항을 알려주셨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대부분 비슷한 방법으로 영유아의 여권을 만드는 것 같아서 우선 외출복 중 가장 좋은 옷을 골라 힘들여 입혔다. 어려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는 아이는 꺼끌꺼끌한 외출복이 못내 불편해 칭얼거렸다. 그래도 중국에 있는 아빠는 보고 살아야 하니 여권은 꼭 필요해서 잠깐잠깐 아이가 앉은 자세 그대로 있을 수 있도록 엄마와 동생이 아이의 시선을 끌어주었다. 나는 찰나를 놓칠세라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앉아있기도 힘든 아이가 몸에 힘을 주느라 목이 눌려 얼굴과 어깨만 덩그러니 보였지만 우리 가족 눈에는 그 모습마저 귀엽기만 했다.


사진 파일을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 사진관에서 오케이 확인을 받고, 잠시 앉아 있다 사진을 들고 시청에 갔다. 여권 민원 창구에는 오직 나 혼자뿐이어서 번호표를 뽑을 필요도 없었다. 안내받은 대로 시청 민원인 책상에 작성된 유리 덮개 밑 예시 양식에 따라 서류를 작성하고 여권 신청 접수를 했다. 시청은 예전 내가 줄을 섰던 건물의 10배 정도는 커진 듯했고 계속 머무르고 싶을 만큼 쾌적했다. 3일 후면 여권이 발급된다는 마지막 안내를 받고 카페에 다녀 가는 것 마냥 여유롭게 모든 절차를 마쳤다. 시청 문을 나서며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세상 진짜 좋아졌네...’


중년이 된 것이 실감 나지 않는데, 나이를 먹긴 먹은 것 같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다른 것으로 변한 것을 눈으로 볼 때, 세상 편한 방법을 경험할 때 세상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 서류를 들고 줄을 서던 게 생생하게 기억되는데,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것 같은 일들이 15년도 더 된 일이라는 게 놀랍고 서글프다.


어릴 적부터 남들이 보면 별거 아닌데도 아빠가 보시기에 좋은 일이 있거나 딸들이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아빠가 자랑스러워하시며 칭찬으로 해주시던 말씀이 있다.


“우리 딸 출세했네.”


며칠 만에 아들의 여권을 수령하고, 아무것도 모를 아이 옆에 놓고 말해주었다.


 “우리 아들 출세했네.”


가족의 여권은 내 손으로 만들었고, 우리 아이의 여권은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이제는 미성년 자녀와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는 직계 가족이라 해도 대리해서 여권을 만들 수 없고, 여행사의 여권 대행 업무도 불법이 되었다. 그리고 여권은 전자칩을 삽입한 남색 표지의 여권으로 또 한 번 바뀌었다. 세상은 변하고 법도 변하고 방법도 변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알고 있으려나. 예전에는 여권 갖기가, 다른 나라에 가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는 것을. 나도 이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


추억도 이렇게 쌓이고 나이도 이렇게 먹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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