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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Oct 27. 2022

태국에서 만난 양심 없던 사람

영화. 위플래쉬.

어렵게 여권을 만들고 여행지를 물색했다. 첫 해외여행으로는 ‘태국’이 좋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가깝고 여행 비용이 적게 들지만 말 그대로 관광 거리가 많다는 것이었다. 여러 의견을 취합해 목적지로 태국을 정한 뒤 정보전에 돌입했다. 배낭여행도 좋지만, 우리 세 모녀가 더운 날씨에 지도를 보며 걷는 모습을 상상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서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여행사 상품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행의 목적은 ‘힘들지 않은, 다시 떠나고 싶은 해외여행’이었다. 여행하고 싶지 않다는 엄마를 설득해 떠나는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께 효도도 할 겸 이번 여행을 시작으로 엄마가 다른 분들과도 함께 여행을 다니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려면 패키지여행에서 가장 많이 지적되는 선택 관광과 쇼핑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패키지여행이지만 무리가 되지 않는 일정과 자유시간도 중요했다. 여행사 상품을 비교해보다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딱 맞는 상품을 발견했다. 노옵션, 노쇼핑이었으며 언제든 고객이 원할 때는 자유시간이 가능한 상품이었다. 단 여행 비용이 일반상품과 2배 이상 차이 났다. 금액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첫 여행’이라는 의의가 있었다. 무조건 만족 가득한 여행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비용 부담을 뒤로하고 해당 상품으로 결정했다.


 여행사가 있는 패키지여행이었지만, 첫 해외여행이고 엄마를 모시고 간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어 보름 가까이 잠을 아껴가며 여행 준비를 했다. 방콕의 지도를 보고 또 보고, 몇 년간의 공사 끝에 개통되었다는 방콕의 지하철 노선표를 외우듯이 보았다. 그러나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방콕 온도는 생애 처음 겪어보는, 숨이 막히는 듯한 더위였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더 덥고 습한 공기에 당황해서 짐을 찾는 일도 한참이나 걸렸다. 세 모녀의 불안이 만든 가시 돋친 말들은 우리의 분위기를 다운시켰고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 공항을 나왔다. 우리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던 가이드를 만나 봉고차에 앉아서야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짧은 인사 후 가이드는 우리에게 물었다.


“해외여행은 처음이세요?”


 “네 처음이에요.”


그 뒤 특별한 대화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제법 큰 식당이었는데 첫 식사는 가이드 본인이 우리에게 인사 겸 대접하는 식사라고 했다. 샤부샤부가 익숙해서인지 태국 음식인 수끼 역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고 맛도 있었다. 얼추 식사가 끝나가자 가이드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여러분이 선택하신 여행 상품은 자유시간이 많습니다. 물론 이동 시 차가 필요하시거나 여행 중 어려움이 있으시거나 가보고 싶으신 곳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함께합니다. 필요하실 때는 꼭 연락해 주세요.”


우리는 가이드의 상냥함에 미소로 답을 했다. 중심가에서 호텔까지의 거리는 멀었지만, 호텔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었다. 호텔이 넓고 깨끗했으며 무엇보다 조식이 좋아서 여행 기분이 났다.


여행은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곳에서 가이드를 만나고, 자유일정일 때는 지도를 보며 일정을 이어갔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자 가이드 얼굴은 보기 힘들어지고 통화도 잘 안되었다. 기억으로는 분명히 이 일정은 가이드가 교통편을 제공하고 입장료를 지불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가이드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듯이 전화 통화로 지하철 노선만 알려주거나 다른 일정을 추천하는 식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무언가를 물어봐도 “확인해보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 후 답변이 없었고, 간단한 태국 문화나 글자를 물어보아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 정말 이 사람을 믿어도 되나?” 싶어질 때쯤 태국 하면 떠올리는 트랜스젠더 쇼를 보기 위해 가이드를 만났다. 공연 티켓 비용은 여행사에서 지불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이 쇼를 본인도 몇 번이나 볼만큼 좋아해서 남편과 함께 왔다고 했다. 우리는 눈인사를 하고 공연장에 입장했다. 공연장은 외관부터 내가 인터넷으로 봐 오던 것과 달랐다. 소극장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크기였고 그 쿰쿰한 냄새는 사람을 불쾌하게 했다. 공연은 당연히 엉망진창이었다. “정말 사람들은 이런 공연을 보기 위해 태국에 온단 말인가!” 의심이 걷히질 않아 뒤를 돌아보니 가이드는 남편과 화기애애하게 공연장에서 제공되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이드와 그의 부군은 저녁 식사 후 공짜 맥주를 먹기 위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이드는 쇼의 티켓은 분명 제공했다. 하지만 비슷한 공연 중 평이 좋지 않은 공연의 저렴한 티켓을 구매해 구색만 맞춘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공연의 모습이나 공연장을 확인하지 못했더라면 여행을 다녀온 후 태국의 쇼가 형편없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이드는 태국의 입장에서 보아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가이드에 대한 불신과 실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첫 여행이었고, 외국 여행이나 생활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가이드뿐이라는 생각에 불만을 토로하지도 못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가이드가 우리를 방임해서 우리 모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걷다 보니 우연히 현지인들이 찾는 식당이나 마사지점에 방문하게 되어 맛있는 요리를 현지 비용으로 맛보고, 전문가의 마사지를 받으며 피로를 풀었다.


어느 방송에서 범죄심리학자 박지선 교수 드럼 연주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 < 위플래쉬> 주인공 대학생 ‘니먼’과 교수 ‘테런스 플레처’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규정한 것을 보았다. 위플래쉬는 명문 음악대학에서 유명 연주가를 꿈꾸는 학생이 재능과 장래를 담보로 악독한 교수 ‘플레처’에게 조정당하는 내용이다. 꿈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학생 ‘니먼’을 악독하게 가스 라이팅 할 대상으로 삼기 전 플레처는 부드러운 말로 니먼에게 질문한다.


“부모님은 음악가인가?”    
“아뇨”     
“그럼 뭘 하셔?”     
“아버지는 작가세요.”     
“뭘 쓰셨지?”    
 
...         

 “어머니는 뭘 하시고”      

....     

“가족 중 음악가는 없군”           


박지선 교수는 이에 대해 “내가 해를 끼쳤을 때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지 호구조사로 미리 확인한 것”이라고 했다. 소름 끼치는 상황이다. 우리는 지금껏 같은 이유로 비슷한 질문에 답하며 살아왔고, 때로는 우리가 질문자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첫 질문이었던 “해외여행은 처음이세요?”는 우연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우리를 물색하기 위한 의도된, 이 여행의 형태를 결정짓기 위한 질문이었다. 또한 ‘직업’이라는 측면으로 보았을 때도 책임감 없고 전문성 없는 그리고 같은 직종의 누군가를 욕보인 사람이었다. 가이드에게는 도덕적 의식이, 양심이 없었다.


여행 내내, 비행기에서 내내 여행사에 ‘한 소리’를 하리라 다짐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패키지여행 속 자유여행이란 타이틀에 맞게, 사람이 하는 일답게 잘잘못을 따지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우리에게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행을 다니며 ‘나쁜 사람’이라고 표현될 만한 가이드는 지금까지 그 사람 딱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 모녀에게 한 행동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하며 피해자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부디 그가 가이드라는 직업을 지금까지 하고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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