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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Oct 25. 2022

쌍둥이 ‘칼’을 대신한 황태자 ‘칼’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결말 스포 있습니다^^  


열흘 가까이 정신없이 서유럽을 누볐다.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기차를 타고, 걷고 또 걸었다. 패키지여행 팀원들이 지쳐서 눈이 가물가물해질 때면 인솔자는 ‘쌍둥이 칼’을 외쳤다.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 중반, 헹켈의 쌍둥이 칼이 유행하던 시점이었다. 여행객의 절반 이상이 주부들이었기에 여행 마지막쯤 방문 계획된 쌍둥이 칼 쇼핑에 대한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독일 일정이 있던 날, 이러저러한 작은 사건과 기다림으로 계획된 시간보다 늦게 독일에 도착했다. ‘이곳이 독일인가!’ 했을 때는 이미 사방의 어슴푸레함이 몰려오고 있을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 불길함과 눈을 맞춘 인솔자는 다급함에 길을 헤매기 시작했고, 여행계의 프로답지 않게 고개를 좌우로 번갈아 돌리며 골목골목을 훑었다. 그리고 스무 명이 넘는 여행객들은 인솔자를 새끼오리처럼 잰걸음으로 졸졸 따랐다.     


범상치 않았던 하루의 자잘한 사건과 흐릿한 하늘은 이미 불길한 사태를 예견했던 것일까. 도착한 매장은 이미 문이 닫힌 상태였다. 늦은 시간까지 매장을 운영하는 우리나라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현지의 짧은 영업시간에 불만을 터트렸다. 아쉬운 한숨 소리는 이어졌지만, 인솔자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한숨 소리와 침묵이 길어질수록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그 모든 것이 인솔자를 향하고 있음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별도리 없이 호텔로 이동해 다음 날 근처의 대학가를 둘러보았다. 딱히 인상적인 장소나 풍경은 없었다. 독일은 그렇게 ‘관광’보다는 ‘경유’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짧게 여행을 마치고 다시 다른 나라의 국경을 넘기 위해 관광버스에 앉았다.     


차 안의 공기는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았다. 버스가 10분쯤 달렸을 때 인솔자가 애써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번 일정은 선택 관광이지만 많은 분이 꼭 참여하셨으면 합니다. 바로 월트디즈니 백설 공주 성의 모티브가 된 ‘노이슈반스타인성’입니다. 디즈니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성이며, 세계의 관광객이 찾는 아름다운 명소입니다.”     


인솔자는 열과 성의를 다해 장소를 설명했다. 지금은 여행 전에 선택 관광이 이루어지는 장소나 내용, 비용 등이 정확히 명시되지만, 당시 우리의 여행은 소규모 여행사에서 진행되던 친목 형태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선택 관광 역시 상황에 따라 변경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신 과반수가 선택 관광을 신청해야 관광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인솔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응도는 낮았다. 여행객들이 서로 알고 지내던 터라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기도 했다. 분위기를 간파한 인솔자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 여행사를 운영하고 많은 곳을 다니며, 그 나라에서만큼은 꼭 가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장소가 한두 곳은 있습니다. 선택 관광이기에 비용 부담이 있으실 수도 있고, 여행 막바지라 피곤하실 수도 있지만 ‘노이슈반스타인성’은 꼭 함께 다녀오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일까지 와서 아름다운 성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눈치 게임에 들어선 일행은 누구 하나 쉽게 참여 의사를 표현하지 못했다. 인솔자에게나, 단체 속에 속해있어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개인에게나 참으로 안타깝고 잔인한 상황이었다.  결국 인솔자와 몇몇 개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성’에 멈추지 않고 다른 나라의 국경을 향해 그대로 몇 시간을 달리게 되었다. 인솔자는 여러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눈을 보며 감상하시기에 좋은 로맨틱한 영화가 있습니다. 예전 독일의 무성 흑백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하이델베르크’를 기억할 수 있는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관광버스 안의 작은 텔레비전으로 자막이 올랐다. 영화는 ‘황태자의 첫사랑’이었다. 이웃 강국의 공주와 결혼해야 하는 칼스버그의 황태자 ‘칼’이 인간미가 없다는 이유로 공주에게 퇴짜를 맞는다. 황제는 황태자를 사람 냄새나는 사람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유학 보낸다. 황태자는 하숙집에서 일하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루다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왕국과 왕위를 위해 궁으로 돌아가게 되고 칼과 루다는서로의 첫사랑에게 담담하게 작별을 고한다. 요즘 영화와 비교하자면 스토리는 평범하고 뻔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영화는 버스 안 대부분의 관객이 집중해서 볼만큼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고 재밌었다.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의 장면



영화를 한 편 본 후 버스에서 내릴 때는 여행객들 모두 전날의 아쉬움은 영화에 녹여 사그라트린 듯했다. 다행히도 황태자 ‘칼’은 헹켈의 ‘칼’을 잊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호전적인 눈빛으로 무장한 다수를 온화하게 진정시킬 수 있는 베테랑 인솔자의 실력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실력의 진면모는 역시 위기의 순간에 발휘되는 법이니까.  ‘황태자의 첫사랑’ 관람 이후 일행들은 다시 조곤조곤한 수다를 이어갔고, 인솔자와 함께 간식을 주고받았다.     


지금도 ‘독일’ 하면 ‘쌍둥이 칼’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황태자의 첫사랑처럼, 쌍둥이 칼과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기억과 추억을 얻었다. 언젠가는 꼭 ‘노인슈반슈타인성’도 가 볼 수 있기를, 더 많은 기억을 쌓을 수 있기를, 그리고 과하게 날을 세우고 있는 내가 어디에서든 '인간미'를 잃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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