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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Oct 23. 2022

멋이 흘러넘치던 예술가와  이혼법으로 기억된 이탈리아

해외여행 . 이혼  . 관계

이탈리아 현지 가이드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자 버스 안의 일행은 모두 감탄 섞인 환호를 보냈다. 가이드의 목소리는 중저음의 바리톤으로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 사는 목소리가 멋진 청년! 굳이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가 성악가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십 대 중반에 이탈리아로 유학 와 부인과 함께 1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그는 방문하는 관광지 곳곳의 의미를 유익하고 쉽게 설명해 주었고, 틈이 날 때마다 본인이 겪어서 알고 있는 이탈리아의 문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탈리아의 이혼법이었다. 바티칸이 독립적인 주권국가임을 인정하는 ‘라테라노 조약’이 1929년에 이탈리아와 바티칸 사이에 체결된 이후 이탈리아에는 국교가 없다. 하지만 인구의 85퍼센트 이상이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역사와 문화의 관습 하에 여전히 가톨릭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그러한 이유로 1970년까지는 이혼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후 이혼 관련 법이 제정되어 숙려기간을 5년으로 정했지만, 기한이 만료된 후에도 숙려기간이 연장되거나 다른 사유로 국가에서 이혼을 승인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서류상으로 이혼하지 못한 채 중첩의 상태로 다른 사람과 결혼 생활을 시작하기도 했다고 했다.


동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에 자유롭고, 개인의 생활에 있어 법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우선시될 것만 같은 국가에서, 많은 자유로운 예술가들이 꿈꾸는 바로 이곳에서 1970년대까지 이혼이라는 법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우리에게도 이혼이 가볍지는 않지만, 부부간에 서로 ‘합의’만 된다면 몇 개월 안에 처리할 수 있는 절차가 유럽 국가에서 쉽지 않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거리상으로도 역사적 관련성으로도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가까운 국가는 아니지만, 피자와 파스타 덕분인지 문화적으로는 멀지 않다고 느껴왔던 이탈리아가 달리 느껴졌다.


가이드는 본인이 받아온 이탈리아의 ‘정’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유학 초기에 사는 집에서 현재까지도 머물고 있는데, 집주인 부부와 자녀들은 한국인 유학생 부부를 가족처럼 여겨주고 챙겨준다고 했다. 가이드의 배우자가 이탈리아인과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난 적이 있었는데, 혹여나 언어가 서툰 외국인으로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되어 자녀분들께서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달려와 교통사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또 한집에서 오래 살면서  계속 같은 렌트비를 내고 있어서 죄송한 마음에 부인과 상의해 렌트비를 더 드렸더니 집주인 부부께서 “우리는 너희를 자식처럼 여겼는데 너희가 이런 모습을 보여 마음이 아프다”라며 돈을 받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분들을 이탈리아의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살면서 딱 한 번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못하고 눈을 맞추며 인사하지 못한 때가 있었는데 바로 2002년 월드컵 때였다고 한다. 이탈리에서 ‘축구’는 그들의 자부심이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이탈리아를 꺾은 후에는 사고 발생을 막기 위해 교민들이 바깥출입을 자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자랑인 2002년 월드컵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 안의 관광객들은 환희를 감추지 못했다.


가이드 부부는 음악을 사랑하고 이탈리아의 삶에 익숙해져 앞으로도 이탈리아에서 머물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영주권’ 제도와 같은 합법적인 이민이 존재하지 않아 ‘장기거주증’ 정도로 만족하며 살고 있지만, 외국인 신분으로서 살아가는 불안함과 불편함은 존재한다고 했다.


멋이 흘러넘치는 예술가와 며칠을 함께 하며 친해지자 여행객들은 부부의 자녀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가이드는 “저희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습니다. 딩크 부부입니다.”하고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 우리 사회에서 결혼에는 응당 자녀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자녀가 없는 부부를 향해서는 사실과 다르게 ‘불임’이라는 틀을 씌우기도 했다. 여전히 결혼 후 자녀의 유무를 중요시하지만, 현재는 ‘불임’이라는 말 대신 ‘난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것과 별개로 자녀 출산을 개인의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어 ‘딩크족 부부’에 대한 인식도 많이 변화하였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딩크족 부부가 여섯 쌍 정도 되며, 이제는 부부관계나 가족의 형태를 캐묻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인식도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여행 당시 나도 ‘딩크족’은 대학교 경제학 시간에 잠시 들어보았던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가이드 부부의 가족 형태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나이 드신 분들은 가이드의 이야기를 경청하시긴 했지만, 이동 중 슬그머니 가이드 옆을 지나며 “그래도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있어야 좋아요”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가이드는 그런 분위기와 이야기들이 익숙한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 상황을 모면했다.


잠깐씩 자유시간이 있을 때면 가이드는 한쪽 자리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탈리아에서 살게 된 후 본인도 이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커피에 물이나 우유, 얼음을 넣는 것보다는 뜨거운 에스프레소가 익숙해져 하루에도 몇 잔씩 마시고 있다고 했다. 커피 향이 진해서일까.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그에게서 진한 예술가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탈리아의 음악가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15년 가까이 잊히지 않고 있다. 이제 얼굴과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깊은 견해와 생활 속 생생한 경험담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역시 공부는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닌 직접 보고 듣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당시 들었던 이탈리아의 혼인과 이혼 제도가 궁금해 찾아보니 2015년에 이혼 숙려기간이 3년에서 6개월로 단축되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그동안 이혼 절차를 밟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혼 신청을 하면서 이혼율이 증가했으며, 그중에는 단연 황혼 이혼도 많다는 기사가 현실을 슬프게 했다. 사람의 마음을 법으로 묶어둘 수는 없던 것 같다.


사랑은 감추려 해도 티가 난다. 젊은 예술가의 눈에서 이탈리아를 사랑하고,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가득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과 결이 같은 분을 아내로 맞이했을 것이다. 성실하고 정직한, 그리고 이탈리아의 예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젊은 이방인들을 이탈리아 집주인은 아끼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악한 이들은 있다. 가이드의 말씀처럼 이탈리아에도 우리와 같은 ‘정’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분의 선함이 밝음을 불러들였을 것이라고, 신이 그에게 그와 같은 이들을 만나게 해 주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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