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가지
국립극단. 한민족 디아스포라전. 백성희장민호극장. 2017. 6. 22. - 7. 2. <가지>. 작 줄리아 조, 연출 정승현.
동네 슈퍼에서 레토르트 사골곰탕을 사와 얇은 냄비에 넣고 끓인다. 물을 조금 더 넣고 소금을 쳐도 좋다. 국물이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미리 찬물에 불려둔 떡을 넣는다. 떡이 퍼진다 싶으면 냉동 만두를 몇 개 띄운다. 만두가 동동 뜨면 계란을 풀고 파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 넣은 뒤 짭짤한 김을 부숴 올린다. 숟가락으로 잘 저어 불어서 식혀가며 먹는다. 내게 가장 맛있는 떡만둣국이다. 정성껏 하룻밤을 달인 사골 국물로 만든 떡국보다, 손으로 빚은 만두를 넣은 만둣국보다 난 이 떡국이 좋다.
줄리아 조(Julia Cho)가 쓰고 정승현이 연출한 연극 <가지>에 등장하는 인물 각자에게는 가장 좋은 맛의 추억이 있다. 본격적으로 무대 막이 오르기 전, 그 앞에 홀로 등장해 남편과 함께 상속받은 돈으로 식도락 여행을 하며 온갖 맛있는 것을 먹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한 여성은 그 모든 음식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수술 전날 만들어준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추억한다. 막이 오르고, 무대에는 침대가 있다. 그 위에 누워 아무 음식도 삼킬 수 없는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한국계 미국인 2세 레이. 그의 직업은 요리사다.
레이는 한인 2세인 전 여자 친구 코넬리아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가 평생 지니고 다녔던, 평생 울리지 않던 휴대전화로 삼촌에게 전화를 건다. 삼촌은 한달음에 미국으로 달려와 한인타운에서 자라를 사 온다. 그리고 평소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요리를 잘하던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전부 비웠던 기억을 이야기하며, 이번에는 그를 붙잡아야 한다며 레이에게 자라로 요리를 하라고 한다. 하지만 레이는 아버지가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코넬리아의 독백을 통해 연극은 다시금 추억한다. 냉장고가 네 대 있던 집에서 자란 코넬리아의 소울푸드는 아버지가 기르던 정원에서 자란 오디다. 코넬리아는 어찌 알았는지 자신을 초대한 레이가 대접한 오디 한 접시에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작가 줄리아 조는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각자 가장 좋은 맛 하나씩을 쥐어 준다. 유학을 하고 돌아온 레이가 차려놓은 온갖 맛있는 음식 앞에서 시큰둥하던 아버지에게는 혼자 밤에 몰래 끓여먹는 라면, 아버지를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 루시엔에게는 난민촌에서 만들어먹던 가지 요리 등.
레이는 코넬리아에게 오디를 선물하고, 루시엔에게는 난민촌의 가지를 구해와 요리 해 선물하고, 식도락가 여성에게는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선물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요리사이지만, 아버지에게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디아스포라가 되어 커다란 외로움 속에 거울 앞에서 밥을 뜨다 관에 든 자신을 상상했던 아버지와, 한국말을 잊은 레이, 가장 가까운 그들 사이에 놓인 존재의 물음에 대한 ‘다름’의 격차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아버지는 레이의 요리를 맛보지 못했고, 레이는 아버지를 크게 부른다. 그 모든 과정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겨운 여정이었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 보고 앉아 한 술 뜨며 미소 짓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연출은 그들이 서로에게서 발견한 죽음이라는 커다란 명제를 객석에 던진다. 죽어가는 모든 것에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위로다. 그 위로는 누군가가 나에게 끓여준, 한 그릇의 떡국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알 수 없는 세계, 속했던 문화적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려 노력하지만 다른 곳에 있기에 필연적으로 그 전개가 다른, 그래서 정의하기 힘든 디아스포라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 연극 <가지>는 그들의 ‘맛’을 상상했고, 그들을 ‘죽음’으로 엮었다. 우리는 디아스포라를 논의하며 한국인이 누구이고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작가 줄리아 조는 그것을 가볍게 획득했다. 모두에겐 그만의 그 다운 기억이 있어서, 가장 먼 곳에 있던 그를 불러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싸구려 사골곰탕으로 끓인 떡국은 나를 밥상 앞에 앉힌다. 맞은편에는 가장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앉아있다. 그녀는 나의 뿌리, 나의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