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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 Aug 22. 2019

할머니의 하얀 자반고등어 찜

사물일기 05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고등어찜을 꺼내 데우고 찬밥을 물에 만다. 식탁 의자에 앉아 한 술 푼다. 밥을 대충 씹다가 젓가락으로 고등어의 살점을 뜯어내 입에 넣는다. 고등어의 비릿하고 고소한 풍미와 함께 청량고추의 매콤함과 짭짤한 소금의 맛이 입맛을 돋운다. 무더운 한낮의 식사는 단순한 것이 좋다. 물에 만 찬 밥에 할머니의 하얀 고등어찜. 이는 할머니의 친구가 개발한, 짠 맛을 살려 하얗게 조리한 간고등어 요리다.

생선의 비릿한 맛을 잘 모르던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와 지낼 때 였다. 생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이 요리를 입에 넣자마자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생선이에요? 할머니는 간고등어라고 답했다. 간고등어. 간간한 고등어인가? 정말 맛있다! 나는 말없이 고등어 요리를 먹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눈치를 채셨는지, 지금도 이따금씩 고등어 해줄까 물어보신다. 나는 사실 할머니의 요리 중에서 이 하얀 자반고등어 찜을 가장 좋아한다.

할머니는 춘천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강원도 춘천시 동면에 위치한 공립 여자고등학교인 춘천여고는 1934년에 개교했다. 할머니는 과거 교사가 춘천시 시내인 교동에 있을때 학교에 다녔다. 1955년 할머니가 고등학생이던 당시, 할머니의 어머니는 소양동에서 목욕탕을 운영하며 홀로 자식들을 키웠는데, 당시 소양 목욕탕이 있던 건물은 춘천 시내에서 가장 큰 이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한국 무용도 배우고, 겨울에는 소양강에서 스케이트도 탔다. 할머니는 늘 자랑처럼 말씀하신다. 당시 스케이트를 갖고 있는 학생은 전교에 단 두 명, 오약국네 딸과 자신 밖에 없었다고.

춘여고에 다니던 시절, 할머니는 네 폭이던 교복 치마를 여섯 복으로 쪼개어 입고 구두를 똑딱거리며 춘천 시내를 누볐다. 학교에서는 운동화만 허용하는 터라, 학교에 도착하기 백미터 전 빵집에 구두를 벗어서 맡겨두고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친구들끼리 모여 아카시아 클럽이라고 이름 짓고, ‘노들강변’ 에 맞춰 춤을 배웠다. 겨울에 열렸던 강원도 체육대회에서는 스케이트를 타고 500미터 1등을 했다. 두명이서 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팔순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한 달에 한 번 있는 춘여고 동창 모임에 나간다. 고등학생이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그때가 너의 전성기였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6.25 전쟁이 휴전하고 다들 치열하게 살아갈 때였다. 고아들을 유학 보내고 삐라를 줍던 시절이었으니, 고등교육을 받으며 스케이트도 타러 다니는 할머니의 콧대는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할머니 또한 그 시절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로 기억한다.

하얀 자반고등어찜은 할머니가 이 동창 모임에서 20여년 전 어느 동창에게 전수받은 레시피다. 우선 간고등어를 잘 골라야 하는데, 무조건 뱃자반이 좋다. 뱃자반은 바다에서 잡은 즉시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으로 절인 고등어를 말한다. 요즈음에는 구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시중에 판매하는 팩에 든 간고등어 중에 뱃자반이라고 써붙인 것들이 있다. 간고등어를 고를 때에는 배를 가른 곳에 등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이 찐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살이 단단하고 눈알이 파랄 수록 싱싱하다.

싱싱한 간고등어를 적당하게 토막 내어 깨끗하게 씻고 냄비에 올린다. 다진 마늘과 어슷하게 썬 매운 고추를 넉넉히 넣는다. 그리고 물을 자작하게 부어 끓인다. 끝이다. 쉽고 단순한 조리법이다. 그래서 고등어가 중요하다. 싱싱한 고등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고, 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때로는 단순한 맛이 더 좋을 때도 있다. 오래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입맛 없을 때 해 먹으라고 전해주기에 적절한.

이 간고등어 요리를 전수해준 할머니의 친구는 이제 더 이상 동창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 어떤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있고, 죽은 친구도 있지만, 이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모임에 나오지 않아 소식을 알 수 없다. 많았던 친구들이 이제는 적어져 동창 모임은 작아졌다. 할머니는 간고등어 요리를 알려준 친구를, 고등학교 때 말수가 적었던 학생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밥을 물에 말아 이 자반고등어찜을 먹을 때 할머니와 할머니의 친구를 생각한다. 간고등어의 맛을 살려 하얗게 쪄낸 이 단순한 요리에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친구들, 그리도 나의 시간이 담겨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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