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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Dec 15. 2023

첫사랑_이반 투르게네프

씨앗 모으기 (Collecting)







Short Review

2023.12.14


INFO.

TITLE  첫사랑

AUTHOR  이반 투르게네프

PUBLISHER  디자인이음(2022)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세 남자가 남아 첫사랑 이야기를 시작한다. 집주인과 세르게이라는 남자는 할 이야기가 마땅하지 않고, 나이 든 독신남인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이 평범하지 않은 첫사랑을 했다고 말한다. 페트로비치는 자신이 말솜씨가 좋지 않으니, 글로 써서 읽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게 소설은 열여섯의 페트로비치가 겪은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소설은 얼핏 주인공 페트로비치가 사랑하는 여인 '지나이다'를 흠모하며 자신의 마음을 적어 내려간 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따라가서 마주하는 건, 페트로비치가 사랑에 빠진 여인이 다른 사내와 사랑에 빠져 어떤 열병을 앓으며 또 어떤 결말에 다다르는가 하는 일종의 목격담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와 사랑에 빠졌다니, 그는 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소설의 외적 갈등이며,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주인공은 무엇을 배우고 깨달을 것인가가 내적 갈등이다. 진실이 무엇일지 독자에게 단서를 충분히 제공하므로 플롯의 초점은 주인공이 언제 진실을 발견할 것인지와 인물의 반응에 맞춰진다.



     작가는 사랑에 빠진 열여섯 소년과 사랑의 열병을 앓는 여인의 모습, 그리고 주변 경쟁자들의 성품을 유려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나의 관심을 가장 잡아끈 건 주인공 페트로비치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책의 귀퉁이를 접어둔 곳은 모두 페트로비치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페트로비치가 묘사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페트로비치가 아버지를 매력적으로 본다.

     "아빠 같은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는 남자를 제법 많이 봤다. 개중에는 다정하고 온화하며 가정적인 성품의 분들도 계셨지만, 대부분은 인격과 성격의 결함이 두드러지나 그를 통해 얻어낸 사회적 실적이 많고, 외적인 포장이 잘 갖추어진 분들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들의(혹은 남자의) 눈에는 그런 부분이 퍽 멋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페트로비치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특이한 영향력을 미쳤고, 우리 관계 역시 특이했다. 내 교육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자유를 존중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아버지는 나를 정중하게 대했다. 단지 나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진심으로 숭배했다.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전형적인 남자였다. 밀어내는 손길을 끊임없이 느끼지 못했다면 아버지에게 얼마나 애착이 강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말 한마디, 몸짓 하나로 나에게 완벽한 신뢰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면 내 영혼이 활짝 열려 현명한 친구나 너그러운 인생 선배를 대하듯 시시콜콜 이야기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러다가도 갑자기 본체만체하며 나를 밀어냈다. 친절하고 온화한 태도였지만 어쨌거나 밀어낸 것이다.

52-52 page.



     페트로비치의 첫사랑은 단언컨대 그의 아버지였을 거다.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뛰어난 남자, 어디서든 자신만의 우아함을 잃지 않는 남자,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아는 남자, 자기 아내를 경멸하듯 바라보지만 가정을 지키는 남자, 동시에 자유를 좇고 갈망하는 남자, 제 아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밀어내는 남자, 그러니 영원히 나를 사랑하지 않을 남자. 페트로비치는 바로 그 남자와 닮은 여인인 지나이다를 사랑하게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인과관계이지 않은가.

     ⟪첫사랑⟫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관계성 때문이다. 페트로비치는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모순된 감정을 심리학자들에게 맡겨두자고 말하며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첫사랑⟫은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자전적 소설이다. 도입부에서 방에 남아있던 세 남자는 집주인과 페트로비치 그리고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인데, 이는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 이름이다. 얼마나 작가 자신이 많이 투영된 소설일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페트로비치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은 두 남자의 반응이 소설에 따로 등장하지 않는 점도 흥미롭다.




그 후 한 달 동안 나는 훌쩍 자랐다. 격렬한 흥분과 고통을 수반한 나의 사랑은 내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어둑어둑해지면 분간할 수 없는 낯설고 아름답지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미지의 사랑에 비해 보잘것없고 유치하고 시시하게 느껴졌다.

143 page.


뇌졸중이 덮친 그날 아침, 아버지는 내게 프랑스어로 편지를 썼다.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조심하렴. 그 짜릿함을 조심해. 그건 천천히 퍼지는 독약과도 같단다."

144 page.



네 매력의 비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가능성에 있다. 너의 힘은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바람에 날려버린 재능이다. 우리 모두는 시간을 허비하지만 않았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지.

148 page.





     소설의 엔딩을 장식하는 짧은 이야기와 마지막 문장을 무척 사랑하지만, 여기에 옮기지는 않겠다. 사실을 선명하게 기록해서 독서의 재미를 망치고 싶지 않으므로 쓰지 못한 감상이 많다. 직접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중편소설이라지만 그중에서도 짧은 중편이고, 뭇사랑 이야기들이 그렇듯 잘 읽힌다.



     나는 사랑이 성취와 획득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자연 발생하는 것은 감정이지 사랑이 아니다. 충동으로 사랑을 완성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끝없이 논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미스터리인 이유는, 그만큼 인류 역사에서 사랑을 성취한 이가 드물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열병이 사랑에 동반되는 흔한 증상 중 하나라고 할 때, 이 소설은 열병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두 남자를 세워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면 곧바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진정 첫사랑을 겪은 사람은 누구인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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