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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Mar 03. 2024

[에세이] 이름의 낭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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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카카오톡을 열면 친구 목록 가장 하단에 사람들 이름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대괄호 안에 상대방을 처음 만났던 집단을 쓴다. 학교, 직장, 모임 이름 따위를 간추린다. 괄호 옆에 성과 이름을 쓴다. 명명 없이 제멋대로 흩뿌려져 있는 이름이 더 많은데, 대부분 굳이 손댈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교류가 없는 경우다.


이십 대 초반까지는 좋아하고 가까운 지인들의 이름을 애칭으로 저장했다. 하지만 별칭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자주 바뀌었다. 검색하는 데 애를 먹으면서 이름 저장하는 방식을 본명으로 통일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끼는 사람들에겐 애칭을 짓는다.


예를 들면, ‘김혜영’이라는 이름의 (구) 룸메이트는 발음에 가까운 ‘기메영’을 변형시켜 ‘메양이’라고 불렀다. 내 고향인 경남에서는 이름의 마지막 글자만 부르는 일이 흔해서 김혜영은 결국 ‘양이’가 되었다. 특유의 수굿한 태도와 내향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 얇고 쇳소리 섞인 목소리 때문에 양이는 이따금 정말 양처럼 보였다. 양아, 양아, 나는 애칭에 사랑을 가득 담아 그 친구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 관계가 멀어진 이후, 내가 그 친구를 양이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키치한 액세서리를 좋아하고 온갖 밈에 정통한 (구) 직장동료는 ‘림짱’. 인생에 도무지 크레셴도나 데크레셴도가 없는, 갑자기 분노하다가 갑자기 수그러드는 아담한 (구) 직장동료는 ‘씅씅’. 나이 차가 위로 스무 살 가까이 나는 친구들에겐 ‘님’을 붙이기도 하고 ‘씨’를 붙이기도 하는데, 마지막 의존명사까지가 애칭이다. ‘씨’를 붙인 친구에게 ‘님’을 붙이는 일은 결단코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름도 애칭도 없이 호칭으로 불리는 관계도 있다.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고,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한없이 가까운 사이지만 매번 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나의 벗처럼. 언어에 민감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애석한 일이다. 엄마는 친정에 가면 외할머니에게 “숙아”하고 불린다. 그 소리에 담기는 다정함에 그만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고 싶어진다. 엄마를 “숙아”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부디 세계에 오래도록 머무르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누군가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일은 참 드물다. 그 소리에 애정이 담기는 일 역시 드물다. 이름 외에 마땅히 상대를 부를 방도가 없어 발생하는 소리는 형식적이다. 그래서 이름에는 불현듯 낭만이 깃든다. 사랑하는 이가 애정을 가득 담아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별수 없이, 백년 전에 태어난 어느 시인의 말처럼 꽃으로 피고 만다. 아,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Fin.


주제: 이름

시간: 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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