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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by 구케인

언제나 글쓰기를 갈망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맞춤 제작한 책장이 거실을 둘러싸고 있었고 이사를 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수천 권의 책이었다. 대중교통으로 대략 왕복 4시간에 달하는 출퇴근을 하시던 아버지의 가방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고, 학교에서 "권장도서 목록"을 받아오면 당장 구입해서 어머니와 번갈아 읽고 감상을 나누었다. 독서 습관의 기본은 독서하는 환경이라고 말하는 여느 전문가들의 말처럼 나는 훌륭한 독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초등학교 입학 직전까지 글을 읽을 줄은 몰랐다. 학습지 선생님이던 어머니는 자기 딸의 문맹에 대해 낙관적이었고 그렇게 벼락치기로 한글을 배워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니 받아쓰기 점수는 형편이 없었다. 기억하기로 나의 최고 받아쓰기 점수는 50점이다. 그 때문인지 나는 글 읽는 속도가 매우 느렸고 현재도 느리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고 머릿속에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으면 넘어가지를 못한다. (이것은 성향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학교에서 운영했던 "아침 10분 독서 시간"을 성실히 활용하여 독서량은 차근차근 늘었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우리 교실은 도서관 바로 옆이었다. 그 사실이 매우 기뻐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있다. 학급 게시판에 독서 기록판을 빨간 스티커로 쌓아가는 것에 성취감을 느꼈다.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을 들락날락거렸다. 딱히 책을 읽지 않아도 도서관의 고요한 적막을 즐기며 책을 구경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의 독서 열망은 이렇게 키워졌다.


그렇다면 작가에 대한 열망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생각해 봤다. 말을 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어머 애기가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할까"하는 칭찬에서 "너는 말이라도 못 하면.." 하는 핀잔까지 골고루 들어봤다. 그렇다 나는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뜰 전형적인 수다 인간이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행위를 사랑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로 모두 했다가는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자제하고 말하고 싶은 것의 절반 정도만 말을 한다. 그래서 전하지 못한 나의 남은 절반은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글자를 쓰는 행위 자체가 좋았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다듬어서 표현하는 행위가 좋았다. 내가 뛰어난 인간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나에겐 글재주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유려하고 창의적이지 않았다. 독보적인 본인만의 감성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부러웠다. 좋아하는 것에 비해 내가 가지고 있는 창의적인 재능은 없었다.


특히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며 약 1년 간 새로운 시놉시스를 매주 하나씩 작성했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첫 시놉시스로 신랄한 평가를 받고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착각 속에 살았구나, 나는 대단하지 않구나. 타고난 성실함으로 선생님이 지도하는 방식을 적극 수용하여 시놉시스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네 글은 너무 착하고 정직해". 맞다, 한국의 평범한 19세에게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었겠는가. 나는 너무 안온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기에 고난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글에 담아낼 수 있는 깊이 자체가 얕았다. 이는 감사할 부분이다. 어려움 없이 밝고 긍정적으로 자랄 수 있게 노력하신 부모님 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가의 삶을 살기에는 결핍으로 발현되었다. 물론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불안 및 걱정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불가능이었다.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나, 꼭 무언가를 고민하는 이야기일 필요는 없지 않나'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면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 가족 시트콤만 봐도 그렇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웃기고 과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 본질은 해학이고 풍자이다. 가난을 들여다 보고, 학벌주의를 비꼬며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나를 들여다보니, 나 역시 그저 행복하고 즐거운 누군가의 삶을 보는 것보다 나의 어려움을 동의하고 위로해 주는 이야기에 감명받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 속의 인물은 결핍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끝끝내 자신의 환경을 타파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창작자는 자신의 결핍을 또는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고민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대학에 가서부터 찾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가 20대를 지나오며 찾은 고민들을 브런치에서 펼쳐보려고 한다. 그 안에는 나의 내면의 우물에서 건져 올린 것들도 있고 사회에서 발견한 것들도 있을 것이며 다양한 작품들을 보며 느낀 감상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잘 다듬어 갈망하던 글쓰기를 더 이상 갈망하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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