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남설희 작가님의 <오늘도 짓는 생활> 덕분이다. 나에게 에세이는 쉼터이다. 마음이 힘들고 걱정이 많으면 항상 에세이를 찾게 된다. 누군가의 단편적인 이야기들 속, 공감 가는 생각과 마음에서 위로를 받는다. <오늘도 짓는 생활> 역시 그랬다. 작가의 말이 끝나고 첫 번째 이야기 '그림자와 그늘'의 첫 문장을 보는 순간 결심했다, 구매해야겠다고. "그림자는 빛이 낳은 사생아다." 이 문장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빛이 닿은 물체는 저마다의 색을 띠지만 동시에 원하지 않아도 그림자가 탄생한다. 빛이 존재하면 어둠도 반드시 존재한다는 당연하고 익숙한 명제를 이토록 매력적으로 표현하다니 말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끝은 그림자가 되기보다는 더 깊어져 그늘이 되자고 한다. 역시나 좋다. 그림자를 떨칠 수 없다면 더 깊이 파고들자는 이 이야기가 마치 나 같다. 나는 무엇하나 그냥 넘어가지를 못한다. 한 가지 의문이 들고 불합리함이 느껴지면 끝까지 나만의 합의점을 찾아 납득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유구한 반골의 역사를 자랑한다.
고등학교 내신 시험 마지막에는 꼭 서술형 문제가 있다. 그런 문제는 대부분 선생님이 나름의 방식으로 언질을 준 정답을 외워 문장으로 작성하면 점수를 받는다. 하지만 난 그것을 순응하지 못했다. 특히, 국어나 역사 같은 개인의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는 과목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랬다. 수많은 학자 분들의 해석이 존재한다 한들 그것이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나의 주장을 설명만 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정답은 아닐지언정 인정받을 수는 있지 않는가. 마냥 사춘기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기엔 나는 초등학생부터 꾸준히 국어 시험 방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어머니를 곤란하게 했었다. 적어도 오지선다가 아닌 서술형 문제에 있어서만은 내가 하지도 않는 생각을 쓰고 정답처리를 받는 행위가 나는 싫었다.
그런데 요즘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대학을 졸업하고 꽤나 긴 방황을 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듣고 알바를 전전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고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나에겐 필요하고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 고민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나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행위가 마치 서술형 문제에 선생님이 알려준 정답을 생성형 AI마냥 써내는 행위 같다. 자기를 소개하라면서 정작 나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저들이 원하는 인재에 나를 끼워 맞춰 얼마큼 그대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형했는가 경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도 이미 안다, 이는 어쩔 수 없고 내가 남의 돈을 벌어먹고살려면 그들이 원하는 부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내 세포 하나하나에서 외치는 이 거북함을 지울 수는 없다.
그 거북함에서 오는 우울함과 거부감을 어떻게든 떨치려고 진짜 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기호에 맞춰 변형한 내가 아닌,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을 위해 나의 일부를 지우거나 과장하지 않은 진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만, 이 의미 없는 자기소개서를 그래도 제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정체를 숨기고 직장 생활을 하는 히어로처럼 내 세상의 균형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내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 가지의 바람이 더 있다면, 내가 위로받고 감명받았던 많은 에세이처럼 내 글을 읽고 누군가도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욕심이기에 바라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이를 바라며 계속해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