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브런치를 시작했다고 알렸다. 숨어있던 브런치 작가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과 브런치 계정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아마 나에게도 이 공간이 매우 은밀하고 사적인 것처럼 그들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면서 공감한 주제는 바로 내가 쓴 글을 하염없이 계속해서 본다는 것이다. 그 누구의 글보다 내가 쓴 나의 글이 제일 재밌다. 아마 나르시시즘과 자아실현이라는 관점에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 발생하는 부작용은 계속해서 글만 쓰고 싶다는 것이다. 할 일을 제쳐두고 계속해서 브런치 소재만 떠오른다. 매주 수요일 업로드라는 목표가 아쉬울 만큼 자주 글을 올리고 싶다.
사실 나는 성실한 블로거이기도 하다. 흘러가는 시간과 감정을 어딘가에 붙잡아 두기 위해 기록용으로 시작을 했다. 한 달치 사진을 모아 올린 일기를 시간이 지나서 읽으면 정말 재밌다. 이때의 나는 이런 걸 하고 이런 생각을 했구나, 맞아 그랬지 재밌었지라는 나만의 최고의 콘텐츠가 된다. 처음엔 블로그에 솔직한 이야기들을 적었다. 그런데 점점 많은 지인들과 블로그를 공유하다 보니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어려워졌다. 괜히 그들에게 내 마음의 짐을 들려주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브런치는 꼭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그 말에 나는 동의한다.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두 개의 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 있던 큰 덩어리가 나에겐 절반의 덩어리가 되지만 상대에겐 없던 슬픔 덩어리가 하나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슬픔 덩어리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때문에 산 정상에 올라가 메아리를 울리는 것처럼 깜빡이는 커서에 대고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마음 편해지는 것 같다. 먼 훗날 나에게 이 응답을 받길 바라며.
반면에 기쁨을 나누는 행위도 동일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쁨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상대의 기쁨 조각이 된다. 하지만 그 밀도와 크기가 동일한지는 모르겠다. 이건 슬픔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받은 나의 감정의 크기와 밀도는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크기와 밀도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엄마.
최근 <폭싹 속았수다>가 방영 중이다. 보면서 참 많이도 엄마 생각이 났다. 그중 금명이가 애순이와 통화할 때 애순이가 그런다. 금명이가 들은 칭찬을 말해달라며 자기도 같이 기쁘고 싶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매번 나한테 하는 말이다. 내가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본인이 잘하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다며 수화기 너머로 들은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내가 슬프면 그 누구보다 슬퍼하고, 내가 기쁘면 그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 그 사람에게만큼은 절대 이 브런치를 알려줄 수 없다. 나의 이야기를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굳이 들여다보게 하고 싶지 않다. 이미 말로 전하는 철없는 내 말들로 충분하다. 언젠가 이 공간을 모두가 알게 된다 하더라도 엄마만큼은 몰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