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마음이 불편한가 - 나만의 '양심의 가책' 찾기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는 위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4장의 화자인 그는 무장한 군인들을 상대로 운동에 참여했던 자신의 행동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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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은 가까우면서도 멀다. 늘상 내 마음속에 있는데도 그게 정확히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고 산다. 아마 그것을 시간 내어 알아보는 일 자체가 드물어서 그런 것 같다. 위의 인용에 쓰여있듯, 내 스스로도 믿지 못할 용기를 낼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졌는데도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너의 양심은 무엇을 향하느냐"고 묻는다면 난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무척 뜬금없을뿐더러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어떤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느냐"고 묻는다면, 몇 가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길 잃은 아이를 보고도 나와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지나가는 일, 불량스러운 학생들 사이에서 안절부절 서있는 학생을 모른 척하는 일, 길에서 무거운 짐을 겨우 들고 가시는 어르신을 그냥 지나쳐 가는 일···
'나'를 파악할 수 있는, 조금 더 일상적인 양심의 가책은 무엇이 있을까? 잠시 머리를 굴려보니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물의를 일으킨 기업의 물건을 소비하는 것
일본 문화를 경계 없이 소비하는 것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여성 위인의 이름을 물었을 때 바로 답하지 못하는 것
과도하게 많은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것
일반 쓰레기와 분리수거용 쓰레기를 구분하지 않고 버리는 것
나라에서 정한 쓰레기 배출용 스티커를 제대로 쓰지 않는 것
집 앞까지 찾아온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않는 것
위의 목록으로 판단해보면 '나'는 잘못한 이들을 내 돈으로 배불려 주는 것과 우리나라의 역사와 여성 위인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 플라스틱을 의식 없이 사용하는 것과 공동생활을 위해 지켜야 할 법을 지키지 않는 것, 그리고 보호받아 마땅한 길거리 동물들을 외면하는 것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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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알아냈다면 내 양심의 방향을 아는 것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 단순히 저것과 반대로만 가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물의를 일으킨 기업을 불매하고, 일본 문화를 접하고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며, 우리나라와 여성 위인들을 잘 알기 위해 더 많은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 또한 플라스틱 사용을 지양하고 그 쓰레기를 버릴 때는 규칙에 따라 잘 버리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면 된다.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부분만 먼저 짚으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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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양심을 아는 것은 나의 '기준'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앞서 말했던 나 자신과의 계속적인 대화로 나의 '주관'을 만드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기준이 생겼을 때 가장 좋은 점은 이중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할 때 늘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이 기준은 비단 남을 대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서 더욱 빛난다. 이것의 대상에는 나도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나에게만 관대 해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나와 남들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다 보면, 좋은 일은 솔선수범 하게 되고, 남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꼴사나운 행동은 하지 않게 되니, 장기적으로 내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삶을 살게 해준다.
내가 어떤 일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가 - 나의 '숨은' 관심사 알기
바깥에 나가는 일이 잦지 않았던 나는 오랜만에 외출해 버스를 타면 핸드폰보단 창 밖을 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사람 구경도, 풍경을 보는 것도, 버스 바로 옆에서 달리는 자그만 승용차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창 밖에는 늘 셀 수 없이 많은 간판들이 있었다. 간판에는 세계 각국에서 건너온 외국어, 외래어뿐만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한국어 단어도 수두룩 했다.
그중 뜻을 모르는 단어를 보게 되면 꼭 검색해서 그 의미를 찾아보았다. 한글로 적혀있는데 유독 프랑스어나 독일어 느낌이 나면 괜히 그 유래가 프랑스나 독일이 맞는지 찾아보고, 한자로 적힌 것은 개중 아는 것만 골라 입술을 움직여 읽어보았으며, 영어로 적힌 가게 이름은 뜻을 찾아보고 그 가게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또 책을 자주 읽진 않았지만, 간혹 읽는다면 그건 대부분 비문학 책이었다. 학습을 하거나 정보를 얻기 위한 용도로 독서를 했기 때문에 항상 그랬다. 한 번은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를 쭉 읽은 적 있는데, 한국사, 그중에서도 조선시대사와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그 시대의 상당한 부분을 담고 있는 기록물은 커다란 선물과 같았다.
그 기록에는 "이 사람 정말 나랑 잘 맞는다" 하는 인물도 있었고, "왜 이 따위로 사나" 싶은 인물도 있었다. 후자의 인물들은 한반도에 먼저 살았던 소중한 조상이라 해도 꼭 존경하고 싶진 않았고, 전자의 인물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름으로 남기기엔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전반적인 삶과 그들 자체에 대해 더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독서 기록 노트에 그들의 이름을 적어두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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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간간이 만났던 궁금증들은 나의 관심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수많은 간판에 적힌 단어들은 나의 '언어'에 대한 관심을, 독서노트에 하나 둘 적은 인물들의 이름은 나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우스운 점은 그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내 것이면 내가 알아야 하는데, 너무 꽁꽁 숨겨진 나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떤 관심사는 일상 속에 흔히 만나는 취향으로, 여가시간을 넘어 밤을 새워가며 즐기는 취미로 나타나지 못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게 되었다.
시대에 따라, 유행에 따라 나의 숨은 관심사를 우연히 만나는 것도 충분히 좋지만, 내가 그것에 먼저 다가갈 필요도 있다.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로 어떤 분야의 책을 읽게 되는지, 혹은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무엇에 대한 기사 제목이 나의 흥미를 유발하고, 또 어떤 것에 대한 블로그 글이 내 눈길을 끄는지 등의 궁금한 마음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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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가지 항목을 통해서는 내가 추구하는 것,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조금 더 눈에 띄게 파악할 수 있다.
나와 항상 붙어있는 '나'라고 해도, 깊이 바라보지 않으면 잘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남들보다 알기 어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대강 짐작하여 흐릿하게 아는 '나'로는 내 자신을 정체화 할 수도, 이다음에 할 일을 정해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양심의 방향과 오랫동안 되고 싶었고 하고 싶었던 관심사를 아는 것은 '나'를 정의 내리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