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고민들은 앞의 <나, 해결하기> 편에서 말한 세 단계만 거쳐도 보통 마무리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도, 무엇이 문제인지도,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있지만 아주 오랫동안 결론 나지 않는 고민들도 있다. 주로 장·단점이 극단적이거나 그것을 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가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때 그렇다.
이런 고민이 있을 때에는 조금 더 성의 있게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종의 '나'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나는 그 보고서를 쓰는 사람이자, 그것을 확인하고, 컨펌까지 내리는 사람이다. 최소한의 후회만 남기고, 책임지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은 이 보고서를 쓰는 규정은 아래와 같다.
STEP1) 단순화 & 시각화
아주 긴 시간 동안 같은 고민을 반복하다 보면, 그 항목이 구분되지 않고 그냥 한 가지 생각에 불필요한 살이 덕지덕지 붙어 비대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1일 차. 그냥 이번 달 안에 퇴사하고 싶다.
2일 차. 내 컨디션 회복을 위해 이번 달 안에 퇴사하고 싶다.
3일 차. 맨날 싫어하는 사람하고 같은 사무실에 앉아 일하면서 스트레스받느니 내 컨디션 회복을 위해 이번 달 안에 퇴사하고 싶다.
4일 차. 맨날 싫어하는 사람하고 같은 사무실에 앉아 일하면서 스트레스받느니 내 컨디션 회복을 위해 이번 달 안에 퇴사하고 한 달 정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5일 차. 맨날 싫어하는 사람하고 같은 사무실에 앉아 일하면서 스트레스받느니 내 컨디션 회복을 위해 이번 달 안에 퇴사하고 한 달 정도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는다.
6일 차. 맨날 싫어하는 사람하고 같은 사무실에 앉아 일하면서 스트레스받느니 내 컨디션 회복을 위해 이번 달 안에 퇴사하고 한 달 정도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경제적 여유도 되지 않고 사직서 내밀 용기도 없다.
7일 차. ······
글로만 보아도 복잡한 이 문장은 심지어 간헐적으로 튀어나온다. 결국 내가 만들어낸 생각인데도 전혀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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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예시에서 최종적으로 도달한 문장 안에는
①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퇴사)
② 그것이 하고 싶은 이유(같이 일하는 동료 때문에 스트레스 받음)
③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경제적 여유와 퇴사할 용기 없음)
④ 해결한 후에 하고 싶은 것(한 달 정도 여행을 떠나 컨디션 회복)
이 네 가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누군가 "너 고민 있어?"라고 물어보면 제대로 답할 수 없게 된다. 겨우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요즘 너무 퇴사하고 싶어. 근데... 아, 모르겠다."라며 마무리를 짓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일시적인 위로는 받을 수 있겠지만 도움 될만한 조언은 받지 못할뿐더러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더 오랜 시간 동안 그 생각을 떠올려야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 해결을 위해서는 그 항목을 각각 나누어 단순화 시켜야 한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더욱 그렇다.
또한 단순화를 진행할 때는 시각화가 곧바로 따라온다. 꼬인 유선 이어폰 줄처럼 한 뭉텅이로 엮여 있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각각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머릿속에서 정리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도 있지만, 완벽한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눈앞에 보이게 적는 것이 낫다.
또 글로 써보고 나면 그중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화보를 위해 찍은 사진이 모두 A컷이 아니듯, 내 머릿속에 떠오른 원인도 진실이 아닐 수 있고, 내가 하고자 했던 목표도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아닐 수 있으며, 겨우 떠올려낸 해결 방안도 모두 현실적이진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글로 써보며 쓸만한 생각과 쓸모없는 생각을 정리해내야 한다.
STEP2) PROS&CONS
단순화와 시각화 작업을 끝낸 후 쓸만한 생각들만 꾸려 온전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나면, 지금 진행할 단계를 위해 그 선택지를 딱 2개로 줄여야 한다. 이번 PROS&CONS 대회의 결승전 참가자를 가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2개의 선택지만 남았다면 무관하지만, 혹여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이 너무 다양해 그 이상으로 선택지가 제시된다면, 그것을 적당량으로 줄이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했듯, '선택권'에 한해서는 '다다익선'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승 후보를 2개로 줄였다면, 이제 PROS&CONS, 즉 각각의 장단점을 가려보아야 한다. 빈 종이에 대충 줄을 그어 표를 만든 후 그 내용을 적어보면 되는데, 처음부터 정리하며 적어도 좋지만, 있는 그대로 적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데 도움 되기 때문에 되도록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날 것 그대로 적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최고와 최악의 경우를 의식적으로 떠올려 적는 것이 좋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렇게 정리할 정도의 성의를 보일 때는 그 문제의 장점과 단점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것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상황, 이것으로 잃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적어보고, 내가 그 최고의 결과까지 욕심나는지, 내가 그 최악의 결과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판단해보는 것이 좋다.
추가로, 그것의 확실성과 관계없이 모두 적는 것을 추천한다.
⑴ 이걸 선택하면 이 결과가 무조건 나온다
⑵ 이걸 선택하면 이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나올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적는 것이다. 이렇게 하길 추천하는 이유는 나중에 모아 놓고 보았을 때 어떤 선택지가 유독 확실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선택지가 유독 불확실한 예상치로만 이루어져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STEP3) 확정하기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일을 꼽아 그것의 장단점까지 표로 완성했다면, 이번엔 마지막 선택을 할 차례다. 이 과정에서 지켜야 할 것은 단 두 가지 뿐이다.
첫 번째, 이성적인 선택을 할 것.
표로 정리해 두었으니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떤 것이 '누가 봐도 나은 선택인지'는 한눈에 보일 것이다. 장점이 많거나, 단점이 적거나, 현실적으로 포기하면 안 될 일이거나, 위험이 너무 큰 일이거나··· 이 중 모로 봐도 괜찮은 선택을 한다.
두 번째, 완전히 확정할 것.
문제가 있는 것을 인식하고,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고, 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한 발짝 나아갈 용기를 내고, 눈에 보이게 글로 적어 장단점을 구분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는 이 고민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다. 특별히 힘든 과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별 일 아니라고 부르기엔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
혹여 이 과정을 거치고도 '확정'을 하지 못해 다시 그 굴레에 빠져든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들이 무척 아까워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진짜' 끝낼 마음을 먹어야 한다. 이것으로 결정이 났고, 앞으로 이 결과가 변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강력히 인식시켜야 한다.
STEP4) 확정 후
확정까지 마친 후, 한동안은 후련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지끈이게 했던 지긋지긋한 고민이 이렇게 쉽게 사라져 버리다니 그 사실이 놀랍고 허망할 수도 있고, 더 이상 그것에 붙잡혀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앞으로 해야 할 일만 다시 고려하면 된다는 사실이 반가울 수도 있다. 이성적인 선택을 해낸 데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는 완벽한 상황이라니, 이대로 쭉 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끝내지 못한다. 두 갈래로 나누어진 선택지의 대부분은 '현실'과 '이상'의 경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현실적으로도 좋고, 내 마음에도 들었다면 그것을 왜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겠는가.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운이 좋다', '마침 잘됐다', '타이밍이 맞았다' 등의 긍정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지 못하고 며칠, 몇 주, 몇 달 내내 고민했다면 그건 분명히 두 선택지 사이에 마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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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이것으로 최종 결정이 났고, 앞으로 이 결과가 변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고 나무판자로 땅땅 막아도, 또 다른 '나'가 튀어나와 "아니 근데···" 하며 반박하는 것을 막을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계속 궁시렁거리는 이 조그만 녀석을 달래는 방법은 STEP3에서 골랐던 이성적인 선택지를 버리고, 그 반대의 선택지를 고르는 것뿐이다. STEP3에서는 '현실'을 위한 선택지를 골랐다면, 이번엔 그 반대편에 있던 나의 '이상'을 위한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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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결국 나의 현실 조건과 상관없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까? 특히 STEP3 에서 왜 이성적인 선택을 먼저 할까? 그냥 곧바로 내 마음 따라 고르면 되는 것 아닐까?
지금까지 고민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성의 있게 정리할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 것도 원인 중 하나겠지만, 어떤 고민들은 정말 반반씩 장단점이 있어 딱 한 가지를 고를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정말 딱 반반일 수 있을까? 난 중립을 믿지 않는다. 아주 간발의 차인 49 대 51이 멀리서 봤을 때 반반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반반으로 나누어지는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한다. 두 선택지 중 하나에는 무조건 단 0.1g이라도 더 무게가 실려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 0.1g의 무게가 이성적인 선택지에 치우쳐져 있었다면 이건 애초에 고민거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상황까지 휩쓸려 온 가장 큰 이유는 "난 이게 하고 싶은데 현실적인 이유로 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마음속 무언가의 외침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너 그거 해도 돼. 상관없어."하고 말해주었다면 내 마음 따라 선택하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에게 책임을 미루면 된다는 생각에 안심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인생이 걸린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쉽게 조언해줄 수 없다. 혹여 누군가 그렇게 말해준다 해도 결국 최종 선택은 나에게 달려있다.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나에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을 때 발생할 문제들을 책임질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이겨낼 것이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선택하고 시작하기 위한 강단이 필요하다. 이 모든 걸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열망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의 것을 선택해 보면 된다. 모로 봐도 나은 이성적 선택지를 고르고도 그것을 바로 수긍하지 못하고 시작하는 걸 우물쭈물하게 된다면, 그건 엄연히 '이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나의 현실 속에 이뤄놓은 것 중 일부를 잃더라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이상'에 대한 열망의 정도다.
오직 이 '확신'을 위해 앞의 생각 정리와 장단점 비교, 한 번의 확정, 확정 후의 내 마음을 살펴보는 과정을 달려온 것이다. 장담하건대, 한 가지 고민에 이 정도 성의를 쏟아부었다면, 미래에 후회하는 일은 잘 없을 것이다. 그 선택으로 인한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와도 절대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선택을 온전히 내가 했으며, 이 선택을 한 이유도 확실하기 때문에. 오직 내가 '원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