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점의 고향인 돌산은 여수 갓김치의 갓을 재배하는 섬이다. 돌산대교가 세워진 1984년 전에는 배로만 다닐 수 있었다. 선점의 아버지 황상모와 어머니 김순희는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부부는 채소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길렀다. 아버지 상모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소작농이지만 새벽부터 밤늦도록 밭에서 지낼 정도로 성실했고 모종을 직접 만들어 과학적인 농사를 꾀할 정도로 앞서나갔다. 덕분에 식구들 밥 굶는 일은 없었다. 1960년 11월 19일, 4남매 중 셋째로 선점이 태어났다.
선점의 아버지 상모는 모친을 뵌 적이 없다. 모친이 그를 낳다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6.25 참전용사인 그는 군대식 사고를 가진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큰아들 선호를 불러 동생이 잘못한 것까지 연대책임을 물어 혼내곤 했다. 선호는 아버지 상모를 이렇게 회상한다. "당신이 사랑받은 경험이 없어 표현할 줄 몰랐던 분이었지." 셋째 선점은 조금 다르게 추억한다. "아빠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딸인 자신을 고등학교까지 보낸, 교육열이 대단한 분이었어." 그런 모습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고 덧붙인다.
아버지 상모는 자녀들을 시내권의 학교에 보내려고 아들 둘과 딸 선점을 데리고 여수 외곽으로 이사했다. 고향을 떠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아내 순희와 아직 초등학생인 넷째는 돌산에 남았다. 새집을 짓는 몇 달간 셋방살이를 했다. 중학교 1학년인 선점은 유일한 여성이라 집안일을 도맡았다. 주인집 할머니는 무섭기로 소문이 났지만 선점에게는 "어린것이 안쓰럽다"며 부드럽게 대하셨다. 그 집에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싱그러운 열매를 맺었다. 할머니는 아무도 열매에 손을 못 대게 했지만, 선점에게만큼은 달랐다. 선점이 결혼할 무렵 할머니는 어린 무화과나무를 선물로 주셨다. 선점은 대문 옆에 그 묘목을 심었다.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선점의 키를 훌쩍 넘었고 해마다 탐스러운 자줏빛 열매를 알알이 맺는다.
선점은 지인의 소개로 남편 일곤을 만났다. 둘은 결혼과 동시에 여수에 자리 잡았다. 일곤은 법인 택시로 경력을 쌓은 뒤 개인택시를 몰았다. 일곤의 수입만으로 넉넉지 않아 선점은 타고난 손재주를 발휘, 재봉틀로 커튼을 만들어 학교에 납품했다. 그러던 중 일곤이 희귀병을 얻어 상황이 어려워졌다. 선점은 자신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로 각오했다. 2001년 아들 빛별의 '별' 딸 사라의 '라'를 따 '별라오리마을'이라는 이름의 식당을 열었다. 나중에 조류인플루엔자가 온 나라를 휩쓸자 다른 메뉴를 추가하면서 상호를 '별라촌'으로 바꾸었다.
여느 때와 같던 어느 날, 선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남편의 부고였다. 와르르 마음이 부서진 자리에 수많은 생각이 난무했다. 이제 대학생이 된 사라와 중학교 2학년인 빛별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무너질 수 없어. 내가 무너지면 아이들이 거리에 나앉게 돼.' 오직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만 선점이 막아낸 바람은 모질기 그지없었다. 10년 사이에 남편을 시작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둘의 장례를 치렀다. 집안의 슬픔은 고스란히 선점의 몫이었다. "저 집은 망했어." 이웃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폭풍이 아이들을 침범하지 못하게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선점은 자녀들이 다른 이를 배려하며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웠다. 엄마의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엇나갈 수 없었다.
선점은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사람이다. 2012년 여름 여수에는 엑스포가 열렸다. 딸은 엑스포 홍보실에서, 아들은 엑스포 운영 요원으로 봉사했기에 선점은 수시로 엑스포장을 돌아다녔다. 하루는 지쳐서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는 어르신을 선점이 발견하고 다가갔다. 당시 엑스포의 인기가 높아 전시관 하나만 보려 해도 1~2시간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어르신, 여기서 왜 이러고 계세요? 일행분들은 어디 계세요?" 어르신은 한숨을 푹 내쉰다. "모처럼 구경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지치는구먼. 오늘 돌아가야겠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나그네에게 선점은 환대의 말을 건넨다. "저희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내일 다시 오세요. 제가 식당을 하는데 대접하고 싶어요." 그렇게 일행 4명은 선점의 식당에서 하루를 묵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전 성주 참외 조합장이었다. 이후 참외 철이면 매년 선점의 집엔 노란 과일 상자가 도착했다. 선점은 참외장아찌를 만들어 주위 분들과 나누고, 성주 어르신에게는 답례로 해마다 돌산 갓김치를 담가 보낸다.
중국어 전공자인 선점의 딸 사라에겐 중국인 친구가 많다. 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꼭 선점의 집에 묵게 해서 대접했다. 그 친구들은 사라에게 엄마 모시고 중국에 오라고 한다. 은혜 갚을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엄마의 환대와 섬김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나누는 삶이 어떻게 풍성한 삶으로 피어나는지를 경험한다. 선점이 물려준 복된 유산이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선점의 부모는 큰오빠와 올케가 30년을 넘게 봉양했다. 그러다 올케의 병세가 악화하여 선점의 동생인 막내가 근처에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선점은 매주 예배를 마치고 타 지역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면서 늘 자녀들을 데리고 갔다. '엄마를 모시고 어딜 가면 좋을까? 무슨 음식을 가져가면 좋아하실까?' 선점은 항상 고민했다. 이런 모습이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선점은 답하곤 했다. "이삼십 년 후 나 자신에게 한다고 생각하며 섬깁니다." 옳다. 선점의 말처럼 마음은 대물림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의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한 그녀다.
선점을 살게 해 준 단어는 '감사'다. 육십오 세면 정년퇴직할 나이인데도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그녀는 가족이 함께 먹고 살 터전인 식당이 있음에 감사하다. 사방이 막혀있어도 위로 하늘이 뚫려있음을 삶으로 배웠다. 하루하루가 그저 하나님의 은혜라고 답하는 그녀. 이 글을 쓴 아들 빛별은 엄마 선점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울렸다. 차곡차곡 쌓인 선점의 하루, 또 하루는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감동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