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없는 희귀병과 함께 질문은 시작되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래도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말해주면 좋지 않을까?
헬라어에는 카이로스라는 말이 있다. 통상적인 시간을 뚫고 나타난 의미의 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를 살면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몸으로 부딪히며, 카이로스를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나’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과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언제 내 가슴이 반응했지? 나는 어느 상황에 재미와 의미를 느끼지?
자기의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혼이 떨리는 삶을 살고 싶다. 하루를 살아도 진짜로 살아있다고 느끼길 원한다. 나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떠났다. 낯선 이방에서의 삶을 적응하고 나니, 다시 권태감을 느꼈다. 하루하루 사는 게 비루했다.
언젠가, 퇴근하고 동네 슈퍼에 앉아 맥주 병나발을 불고 있는데 해거름에 잔잔한 햇살이 온몸을 감쌌다.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 삶에 이런 순간이 있어서 살만 한 걸 거야. 카이로스를 산다는 것은 영혼이 떨리는 것에 반응하면서도, 비루한 일상을 견뎌내는 거지. 그리고 이런 비루한 일상에 들어온 찬란함 속에 감격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여전히 일상은 비루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시간을 잘 견뎌내기로 했다. 잘 견뎌낸 시간은 그대로 내 몸에 축적되어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