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 적힌 글만으로 삶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삶은 직접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머리 바깥으로 나가 사랑에 빠지고, 시를 읊고, 다리에서 강물로 뛰어내리고, 텅 빈 사막에서서 숨죽인 소리로 소네트를 속삭여야 합니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에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사연이,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이 뛰노는 아이처럼 피어나는 장미꽃이 담겨 있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의 이야기에 변화가, 아름다운 것을 태어나게 만드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당신이 떠나야 할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변화할 시간, 빛날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단 한 마디만 되풀이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떠나세요.
이 말을 입안에서 굴려 보세요. 정말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당신이 항상 원했듯 아주 강하고 힘이 넘치는 말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닐 것이며, 결코 혼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은 여기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은 당신입니다.
도널드 밀러, <오색사막 순례 이야기>
강렬했던 대관령을 뒤로하고, 다시 기차에 몸을 실어 강릉으로 향했다. 강릉에 가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이 대관령인 여행이었기에 강릉여행은 뜻하지 않은 보너스로 받은 시간으로 여겼다. 여행 내내 먹구름이 따라다녔고 뉴스에서는 폭우로 인해 사람이 죽어났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것은 비가 막 갠 하늘의 화창함이었다. 어디론가 이동할 때는 비가 쏟아졌고, 가야 할 곳에 도착해서는 경이로운 하늘 풍경을 바라봤다. 마치 신께서 계획한 일정에 맞춰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8.08.29 강릉. 강문 앞바다.
신이 인간과 가장 가까워지는 때. 무심코 걷던 길에서, 문득 하늘을 쳐다보고 감동하게 되었다면. 낯선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따듯한 시선이 느껴졌다면. 불현듯 현재라는 선물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당신은 신을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대. 머무르길.
강릉에 도착해서 무심코 바라봤던 하늘 곳곳에 있는 구름은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그 웅장함 뒤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에 뛰고 감격했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 홀로 세상을 산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결코 혼자였던 적이 없다.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저 하늘도 여행자의 시선엔 위대하게 보일 수 있다.
2018.08.30 강릉. 캡슐 게스트하우스의 아침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이야기를 해 줄게.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학교 백일장이 열렸어. 어려서부터 덜렁댔던 탓에 여느 친구들처럼 미술도구를 챙겨가지 못했던 거야. 그림이나 글짓기가 선택사항이어서 어쩔 수 없이 글짓기를 했어. 그런데 금상을 받은 거야. 전교에서 글짓기를 한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거든.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 그때 어렴풋이 알았어.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는 걸.
오늘부터의 일정은 보너스로 받은 거야.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이 시간 자체가 사랑스러운걸.
옳다.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고 이런 모순이 다시 삶을 살아낼 희망이 되는 것이다. 보너스로 받았다고 생각한 여행의 일정에서 신의 경이를 느낄 수 있었다. 도망치듯이 떠난 여행이었지만 삶을 버텨낼 재료들을 얻는 여행이었다.
2018.08.30 강릉역. 정동진 가는 길.
강릉역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못 찾아, 30분 길을 헤매다 들어간 곳은 초당의 한 커피숍이었어. 순두부가 유명한 그 지역 말이야. 아늑한 느낌의 카페였어. 예전에 정미소였던 건물을 카페로 개조했다더군.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앉아 있는데 어느 시 낭송가가 리허설을 하는 거야. 오세영 시인의 <원시>를 낭독했는데 울 것 같았어. 오후 저녁 7시에 카페에서 있는 시 낭독회에 초대받고, 지금은 정동진에 가는 길이야. 언제나 행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걸.
원시(遠視)
―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일출을 보지 못한대도 해가 떠오른 자리를 보고 싶었다. 정동진에 찾아갔는데, <시간 박물관>이라는 곳이 있었다. 시계의 역사 속 다양한 시계를 보여주고, 시간의 가치에 대해 말해주는 전시 공간이었다.
2018.08.30 정동진. 시간 박물관과 바닷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위하여. 넌 내게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어. 신은 인간에게 공평하게 시간을 주셨지. 우리 인간은 그 시간을 잘 쓰고자, 수 천년 동안 일정한 것을 찾아 헤맸어. 그래, 시계 말이야. 그걸 통해 우리는 신과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아니,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해. 그리고 기나긴 정동진 해변을 하염없이 걷는다. 모래에 발은 푹푹 꺼지고, 갈매기와 파도소리. 그래. 다시 시작이야.
끝을 모르고 하염없이 걷는 발걸음에 신의 섭리가 녹아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 시계를 만들어내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갖은 노력이 있었지만, 그것이 자유를 주지는 못했다.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오늘의 내 발걸음에 은총이 서려 있다고 믿고 살기로 했다.
2018.08.30 초당커피정미소. 음악과 함께하는 시 낭송회.
무슨 말을 해야 이걸 설명할 수 있을까? 애석하다. 나의 짧은 어휘로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아직도 여운이 남아, 이 장소를 떠나면 혹시 이 감정을 잃어버릴 것 같아 가만 눈을 감는다. 그래. 사건은 낭독사님이 관객에 뜬금없이 나를 소개한 것부터 시작했다. 나는 낭독을 들은 소감을 말했고, 다음은... 정신을 차려보니 관람객 앞에서 시를 낭독하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난 관람객이 아니라 낭독회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낭독자의 시에 공감하고, 음악에 마음이 어딘가 떠났다가 돌아오곤 했다. 낭독회는 끝났지만, 가슴이 뛴다. 아, 가슴이 뛴다.
2018.08.31 게스트하우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낯선 파티.
우리는 처음 만나,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의미 없는 게임을 했지. 이 분위기에 나는 실망했던 거야. 피곤하다고 올라가려 했지만- 30분만 더 있다 간다 했어. 그런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 시 낭독회에 다녀온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또 시를 읊어버린 거야. 내친김에 내 일기도 읊었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여행자들은 각자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어. 그리곤 우린 가까워졌어. 잠깐 사이에. 그리고 입을 모아 말했어.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고. 진심은 결국 통하는 걸까?
강릉에서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난생처음 파티라는 것을 해봤는데,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여행자가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시간이다. 처음이라 궁금한 마음에 참여했는데, 이내 실망해 버렸다. 피상적인 대화가 오갔고, 왜 하는지 모를 게임을 했다. 그러다 내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었다. 취업을 앞두고 도망치듯 떠난 이야기, 선물 같았던 여행의 모든 순간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의 선명도를 높이려고 시까지 낭송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아... 또 절제 못하고 내 이야기만 해 버렸구나...’ 하는데 이야기를 경청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순간이지만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2018.08.31 강릉. 강문해변. 일출을 기다렸지만...
어쨌든 날은 밝았다. 저 구름너머, 해는 숨어있을 뿐이다. 해가 뜨고 지고, 바다에 파도가 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인 것을. 잠깐의 먹구름 때문에 너무 실망하지 말길. 어차피 날은 밝아질 거고, 저 구름너머 해가 떠 있는 것을 믿으니까.
그렇게 여행객들과 친목을 다지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해가 떠오른다고 예정된 시각, 일출을 보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다. 비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 때문인지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더 위대한 진리를 몸에 새기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날은 밝았고 저 구름 너머 해가 떠 있을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