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여행 3

by 빛별

요새 들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음을 체감한다. 전보다 말이 더 어눌해졌고 한 발짝 디딜 때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이런 나에게 과거의 여행을 돌아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억을 되짚으며 깨닫게 되었다. 앞이 정해지지 않은 길을 떠날 때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날 쌓아 올렸던 많은 기억들이 모여 내 존엄성을 지켜주고 있다. 비록 건강이 쇠약해져도 이러한 기억들이 내가 나아갈 길을 비춰주고 있다.


2018.08.31 용산 -> 익산 군산으로 돌아가는 무궁화호

객실을 채운 초가을의 햇살. 태양빛이 수그러든 하늘. 이 여행은 도망이었어. 아득한 현실에서의 도망. 무력해 보이는 나로부터 도망. 남들은 무작정 떠난걸 대단하다고 말했지만, 나에겐 비겁한 행동이었는걸. 하지만 초가을의 햇살과 그것에 비친 풍경이 왜 이토록 애틋한 걸까? 왜 이만큼 설렌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오후의 창가에 비친 햇살은 가슴이 아리도록 예뻤다. 비록 도망으로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초월적인 존재가 날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졸업을 앞두고 남들처럼 착실하게 취업준비를 하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겁쟁이, 도망자. 나에게 붙인 수식어였다. 그때의 풍경은... 그런 수식어를 무색해지게 만드는 감동을 줬다.


2018.08.31 익산 -> 전주

끝을 맺는다는 것은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되는 일.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일인 것이다. 열차는 계속해서 움직이므로. 누군가는 또 여행을 시작하겠지. 언젠가 나도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겠지. 그땐 지금보다 좀 더 어른스러웠으면 좋겠어. 덜 상처받고 더 의연했으면 좋겠어.


이 여행은 당시에도 신의 은총으로 여겼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렇게 삶을 어디론가 던져내는 여행처럼, 내 인생도 이렇게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여행을 떠날 때의 마음가짐과 같은 마음을 똑같이 먹고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점을. 다만 이 여행은 나에게 다시 살아낼 용기와 힘을 줬다. 내 발걸음이 끝을 맺는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그간 쌓아왔던 추억을 꺼내어 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다시 떠날 날을 기대하며 오늘을 산다. 그때보다는 조금 어른다워졌음에 감사하다.



2018.09.01 전주. 건지산. 숲속도서관

이번 여행. 폭우 때문에 내심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갔던 자리는 비가 왔거나 곧 올 자리였어. 비가 온 다음의 하늘에 감탄한 적은 있었어도 비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어. 전주도 어제 비가 왔대. 비가 온 뒤의 숲에 곤충과 새소리는 어쩜 이리 선명히 들리는지. 평범한 일상도 이렇게 향기로울 수 있는걸.

길을 떠날 때 갈 길을 막는 무수한 소리가 있다.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나를 위축되게 하는 소리가 있다. 그 소리를 완전히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날 위축되게 하는 메시지에 휘둘리며 살다가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이 여행에서 나를 위축되게 하는 키워드는 ‘폭우’였다. 올라가는 비구름을 따라 나도 한반도를 거슬러 올라갔다. 폭우에 위축되어 길을 떠나지 못했다면 위대한 경험은 없었을 것이다.


2018.09.03 여수. 우리 집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하늘. 폭우 속에서. 여행 첫 날도 똑같이 전주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위협하듯이. 그날, 위축되지 않고 떠난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대관령에 올라가기 전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뉴스에서 내가 지나왔던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고 심지어 내가 묵던 지역엔 한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비 구름은 강원도로 올라갈 거라고 했다. 또 위협하듯이.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현실 너머의 것들로 떠날 수 있는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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