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am 5:51
1년 1독 하고 있는 데미안. 나에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데미안>을 출판사별로 모두 소장하는 것이다. 올해는 [범우사] 버전으로 읽어봤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처음으로 <데미안>을 읽었는데, 그때 읽은 책의 출판사가 [범우사]였다. 다시 읽으며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이 심오한 문장 중 어떤 곳에 그렇게 마음을 뺏겼었는지 상기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늘 느끼는 신기한 점 하나.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작년에는 좀 냉소적인 기분으로 살짝 실망하면서 책을 읽었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내가 평소보다 좀 더 회의적이고 우울했던 것 같다. 올해도 비슷하면 어떻게 하지 살짝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문장 하나하나가 굳세고 든든하게 나를 받쳐주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것 중에 가장 빠른 속도로 읽어나간 건 보너스. 특히 데미안을 읽을 때마다 항상 고전하던 ‘8장 에바부인’과 ‘9장 종말의 시작’을 읽으면서, 드디어 뭔가 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까지는 열심히 글씨는 읽어서 뇌로 집어넣었지만, 솔직히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는 좀 어려웠다.
이런 성장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전에 읽었던 <지적 대화를 위한 가장 넓고 얕은 지식:제로 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책을 읽으며 며칠에 걸쳐서 일원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좀 더 심오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수능 보기 전 윤리 공부 할 때나 열심히 외우던 일원론적 세계관. 내 실제 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저 너머의 정신세계라고 생각했던 그 개념 말이다. 하지만 세계관이라는 게 뭔가. 말 그대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바깥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들 각자의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어 있다. 결국 우리가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이미 특정한 세계관을 언제나 소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데미안의 서두를 읽자마자, 그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인간의 내면과 관련된 문장에서 의미하는 것이 일원론적 세계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작가가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인간의 원래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정답을 동양의 철학인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찾아냈고자 했던 것 같다. 사실 서두뿐만 아니라 데미안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런 가치는 거듭 반복되어 기술된다.
"...하지만 너의 내면에 있는, 너의 생활을 이루고 있는 그 무엇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보다 잘해나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 마음 속에 깃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야..." (131쪽)
우리는 우리와 자연 사이에 있는 경계가 흔들리고 해소되어 버리는 것을 느끼며, 우리들의 망막에 비치는 형상이 외부적인 인상에서 생기는 것인지 혹은 내부적인 것에서 생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158쪽)
깨달은 인간에게는 단 한가지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의 내부에서 확고부동하게 되고, 그것이 어디로 가는 길이건 자기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나가는 일 외에는 다른 사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런 생각이 나를 뒤흔들었다. 각자를 위한 모든 천직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것 하나밖에는 없다. (192쪽)
고등학교 때는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아서, 마치 영어 독해 공부를 하는 것처럼 책에 밑줄을 긋고 해석하면서 읽어야 했다. 나이가 들고 조금씩 이해되거나 깨닫는 부분이 늘어났지만 늘 특정한 장벽에 걸려서 그 이상 넘어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올해 데미안과 나 사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 수도? 데미안을 읽기 전에 내가 <지대얕>을 읽지 않았다면? 읽었더라도 한참 전에 읽었거나 그 뒤에 읽어서 이론과 응용을 서로 매칭하지 못했더라면? 책이라는 매개물에서 운명까지 논하는 것은 오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 데미안은 그만큼 각별한 존재다.
이렇게 해서 올해의 데미안 1독은 끝났지만 벌써 다시 읽고 싶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래서 정여울의 <데미안 프로젝트>라는 책을 사봤다. 이건 또 무슨 내용일지 너무 궁금하다. 이 작가는 나하고 같은 생각일지 아닐지,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을지. 기대감이 충족되는 것도 좋고 실망해도 좋다. 어쨌든 같은 데미안 팬클럽 소속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am 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