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자은, 앞으로 잘 부탁해

정세랑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읽고

by 곽예지나

정세랑 작가의 역량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뭔가 뻔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히 기우였다. 시리즈 추리물의 포문을 여는 첫 번째 책으로 완벽한 자기소개였다.


이 책의 주인공은 죽은 오빠를 대신에 남장을 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통일 신라 시대의 설자은이다. 어릴 때는 가능하지만 나이 먹어서까지 성별을 속이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책 속에서 은근히 ‘신라 시대에는 얼굴이 곱상하고 여성스러운 남자들이 선호되기도 했다.’라는 설정을 흘린다. 꽃미남들의 일색이었다던 화랑도를 떠올리니 갑자기 설득력이 확 높아졌다.

그리고 빌릴 때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주인공의 성이 ‘설’씨였다. 나는 ‘설’씨를 좋아한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은 의외로 중요한 요소이다. 뒤에 붙은 ‘자은’이라는 이름은 다소 평범하거나 밋밋할 수 있지만, 앞에 붙은 설’이라는 독특한 성씨가 주인공에게 임팩트를 실어준다.


주인공과 콤비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하는 목인곤은 첫 등장부터 매력적인 세컨드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는 서사를 팍팍 주는데, 일단 멸망한 백제의 출신이라 과거가 꽁꽁 감추어져 있다는 점이 그렇고, 생김새의 묘사에서 눈꼬리와 입꼬리가 묘하게 웃는 형태라서 무표정일 때도 비밀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는 설명이 그렇다.


다만 인곤의 개성과 매력에 비해 자은의 캐릭터는 (아직까지는) 분명하지 않고 전형적인 모습인데,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인곤이 앞으로 어떻게 자은을 대하고 서술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될 것 같다. 1권에서 결론을 내리기에는 좀 어려워서 일단 이 부분은 보류.


이 책에서는 총 4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고, 첫 에피소드는 등장인물들의 소개와 앞으로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소개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져서 그런지 좀 심심했다. 그래서 더욱 기대 없이 읽었던 두 번째 에피소드가 매 쪽이 주옥같고 설레서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더운 여름날 물 소리 시원한 소쇄원 정자에 앉아서 읽었더니 통일 신라 시대의 정취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느껴서 그랬을까? 너무 먼 과거라서 구체적으로 떠올려보지 못했던 시대의 사람들 머릿속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들이 왜 그렇게 되었으며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절절히 알 수 있었다. 조연들의 스쳐 지나가는 대사 하나도 여러 번 곱씹으면서 읽었다.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보면서 가끔 아쉬웠던 것이, 신사나 일본의 전통문화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 부분에서 그 분위기를 적절히 떠올리지 못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였다. 이런 아쉬움이 이번 설자은 시리즈를 읽으며 완벽히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통일 신라라는 배경이 특유의 정취를 살려 독특함을 주면서도, 단순히 평면적 도구로만 설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와 사람들의 생활상을 적절히 섞어 내어 더욱 읽는 재미가 있었다. 작가가 통일신라 시대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는 ‘고대사의 이야기와 역사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시대이며, 그 어떤 비극에도 안전한 심리적 거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아주 탁월한 선택인 것 같다.


2권이 더 출간되어 있다니, 아직도 읽을 책이 더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고 설렌다. 일단 설자은과의 첫 만남 점수는 95점을 드리겠습니다.


덧) 한 가지 옥에 티라면 티. 통일 신라 시대 사람이면 경상도 사투리를 써야 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해석은 자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