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산, 원효암

민족, 민중을 생각하다.

by 할수있다

원효는 한국 불교의 토대를 구축한 성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영향력 때문인지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은 영남, 호남, 충청, 경기 등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기도 합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백제와의 전쟁, 고구려와의 전쟁, 당나라와의 전쟁, 왜와의 전쟁 등 삼국통일 전쟁으로 얼룩진 격렬한 시기였습니다. 원효대사는 삼국통일전쟁의 주역인 장인 김춘추, 총사령관 김유신을 따라 전장을 함께 누볐습니다. 이는 후에 호국불교의 근간이 되어 많은 승병을 배출하는 영향을 끼칩니다. 원효대사를 기억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 그리고 그 활동의 의미까지는 잘 알지 못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시험을 위한 공부로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운운합니다.


전쟁으로 혼란했던 시대적 배경은 원효가 전국에 사찰을 창건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민중을 왕실 중심으로 단합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자연스럽게 가져야 했던 원효대사였습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의 삶을 보듬고, 왕실과 민중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왕실의 불교가 민중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카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종교를 민중에게 전파했던 방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로마는 압제를 통해서 카돌릭을 민중에게 뿌리내리게 만듭니다. 믿지 않으면 죽이는 공포의 포교였습니다. 카톨릭이라는 종교가 새롭고 진보적인 것이니 받아들여라는 식이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교리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쉽게 포교될 수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재난과 재앙의 위험,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 있어 종교는 필요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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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는 왕실 불교의 전파를 위해 전국에 사찰을 지으면서 민간 신앙과의 융합도 이뤄내었습니다. 민간 신앙이라고 눌러버리거나 없애기보다는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사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산사에 산신이나 용왕 등을 모신 사당이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포교를 위해 민간 신앙을 박살내버린 카돌릭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새롭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변화를 강제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승자이니 과거를 걷어내고, 전통을 타파하고 남의 전통을 뿌리째 뽑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승자로써 전리품을 챙길 위치였지만 전국을 돌며, 사찰 창건을 통해서 민족의 통합에 대한 노력을 했습니다. 단순히 불교 전파에 공이 큰 종교인이 아니라 민족과 민중의 역사를 이어온 위인으로 평가받아야 할 분입니다.


원효암은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천성산에 있습니다. 내원사의 부속암자로, 646년(선덕여왕 15)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원효암은 원효대사를 비롯한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수행했던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중심 법당을 비롯하여 미륵전, 산령각, 범종각, 용화전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심법당은 팔각지붕 형태로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로 지어져 있습니다. 이 곳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1648년(인조 26)에 조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법당의 동편의 석벽에는 마애아미타삼존불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효암이 위치한 곳은 바위가 주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청명한 날에는 바다는 물론 멀리 대마도까지 보이는 천혜의 경관을 간직하고 있는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절 이름에서 고승의 이름을 사용하는 예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원효사나 원효암은 전국적이며 더불어 원효봉, 원효굴, 원효대란 지명이 많습니다. 이는 원효의 민중불교가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효는 백제가 멸망하고 난 뒤에 백제 망국민을 위로하고, 고구려 유민을 위로하는 불교 정책으로 그들을 신라의 민중으로 흡수하는데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삼국전쟁에서 원효가 없었다면 민중의 단합을 이끌어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통일신라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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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암처럼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은 유독 부산과 양산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안적사, 장안사, 선여사, 취정사, 척판암, 선암사, 운수사, 미륵암 등이며 그 외에 가까운 양산지역에 원효암을 중심으로 내원사, 홍룡사, 미타암 등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절의 배치는 왜구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원효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성산 원효암은 경계를 서는 암자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원효암은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까지 관찰이 가능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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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원효암, 금정산 미륵암, 기장 척판암, 천성산 미타암 등은 경계 암자로, 통도사, 범어사, 선암사와 운수사, 장안사, 태화사가 본진으로 왜구를 막는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경주 감은사도 왜구를 저지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산을 비롯한 양산지역에 원효가 창건한 절이 군사적 목적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미타암, 척판암, 원효암, 미륵암 등이 탁 트인 조망권이 확보되어 왜구의 침입을 사전에 발견하여 사전에 방어전을 펼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8-9부 능선의 암벽에 암자를 지어 조망권을 확보하고, 부산과 울산 앞바다까지 훤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사전에 확인했으며, 주요 길목에 사찰을 둠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원효가 민중불교의 기치를 높이며, 군사 목적으로 절을 지은 것은 민족과 민중의 안전과 안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교조적 해석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사는 민중의 안전과 행복을 우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통일신라의 공신이자 왕실의 일원이었음에도 호의호식하기보다는 민중불교, 호국불교의 전파를 위해 전국을 다닌 그의 열정이 그것을 반증합니다. 원효는 왕과 왕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준 사람이었습니다. 외세로부터 민중의 권리와 재산을 지켜주고, 민중의 삶을 보호하는 것이 왕과 왕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죽어서도 외세로부터 민중을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수중릉도 그런 왕의 뜻이 반영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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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이름과 정신이 천삼백 년을 넘어 이어졌지만 민족과 민중의 삶은 여전히 척박합니다. 엄청나게 성장한 산업 생산력, 높은 노동 강도에도 먹고사는 문제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풍요와 번영의 노랫소리를 만들어내는 일부를 빼고는 말입니다. 현 시대의 왕인 대통령이 해야 할 일도 그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외세로부터 민족과 민중을 지켜내고, 상호공존의 감수성을 살려내야 합니다. 천성산의 원효암은 외세로부터 민중을 보호하기 위한 원효의 이름이 새겨진 곳입니다. 민족과 민중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그의 열정이 그의 마음과 함께 남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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