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자, 날자, 날자, 쓰자 쓰자
글을 쓰고 싶다고, 글을 쓰겠다고,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다고, 그 외 세상의 명예니 권력이니 돈이니 이런 모든 것들에 욕심이 없다고 했다. 수도 없이, 재차 강조하면서도 정작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하루에 글을 쓰지 않고 넘어가는 날들이 글을 쓰지 않은 날들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중 글을 쓰는 날이 백일이나 되었을까. 이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 오십일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나태하게 보내면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 나 자신이, 나에게 창피하다. 어디에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직장이 없어서, 직장을 찾아 돈을 벌어서 애들을 키워야 한다는 마음의 불안 때문에, 안정적이지 못한 상황 때문에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핑계 댔다. 그래 핑계였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다음 브런치에서 내 글을 읽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쓴 글을 읽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날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쓴다고 했다. 전업작가로 살기에는 경제적인 부담이 크고, , 가난하게 살 자신이 없기 때문에 돈을 벌어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글은 꼭 쓴다고 했다. 대신 저녁 술 약속과 잠을 줄인다고 했다. 그의 글은 문창과 몇 년을 다니며 소위 문예창작을 배웠다는 내 글보다 훨씬 뛰어났다. 문장은 안정적이고 글에 깊이가 있었다. 숨이 짧지도 않았다. 분량이 길었음에도 하나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 솜씨 또한 뛰어났다. 한 문단에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도 의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히 하나로 모아졌다. 하나의 생각을 향해 달려갔다. 곁에 따라오는 문장들은 그 하나를 위해 줄 지어 서 있는 신하들이었다.
2019년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쯤 된 듯싶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 칠전팔기했다고 했다. 그의 글은 어렵지 않게 읽혔고 쉽게 마음을 적셨다. 내 마음을 때렸다. 정신 차리라고. 평생 글을 쓰고자 한다면 매일 글을 쓰라고. 애들을 키워야 한다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 따위는 대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글과 맞서라고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나를 부끄럽게 했다. 얼마나 게으르게 핑계를 대고 있었는지 실감하게 했다. 나는 작년에 단번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몇 편의 글을 올리지 않았다. 올린 글도 전에 썼던 글을 조금 고친 것에 불과했다. 그의 글은 내 글보다 몇 배가 정직하고 성실했다. 창작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보다 당연히 좋은 글을 쓰지 못하리라는 뭣 같은 논리가 아니다. 단정이나 자만도 아니다. 두 가지 일을, 나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나를 홀딱 벗겨 내 알몸을, 가감 없는 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하나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내게 내리치는 철퇴요, 청천벽력이었다.
이 사람의 글을 읽기 며칠 전, ‘콜레트’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콜레트에게 글을 쓰게 하기 위해 남편이 방에 콜레트를 감금하고 4시간 동안 글을 쓰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콜레트는 그 시간 동안 글을 쓴다. 글쓰기를 배우지도 않았고 그 전에는 글을 쓴 적도 없었던 콜레트였지만,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연극을 하며 무대에도 섰지만, 다시 작가의 길로 돌아와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아직 나는 콜레트의 작품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영화를 보고, 나도 최소한 4시간 동안은 글을 써야겠다고, 반성했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너무 게으른 탓에, 핑계를 대느라고. 정신 차리지 못한 채, 다시 브런치 작가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글을 쓴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다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꾸 쳐다본다. 가만히 있지 못한다. 언젠가 ‘글은 엉덩이로 쓴다더라.’하고 말씀해 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도 소설가셨다. 그때는 그 말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지금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컴퓨터 앞에, 원고지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일 터이다. 엉덩이를 들썩이고 싶어서, 엉덩이를 떼고 걸어 나가는 순간 글은 흐트러진다. 리듬은 깨지고 마음은 세상과 타협한 채 손이 먼저 다른 물건을 집어 든다. 끝난다. 그렇게 오늘의 글쓰기는 끝나게 된다. 4시간이 아니라 한 시간도 채 채우지 못 한 채.
글을 쓰기 위해 앉았다가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가도 ‘무엇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들와서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다른 방들을 기웃거리다 시간을 낭비하고 만다. 컴퓨터가 없이 원고를 앞에 두었을 때는 이런 폐단은 없지 않았을까. 와이파이를 켜 놓지 않고 글을 쓰면 되겠다는 생각도 문득 떠오른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 방금도 나는 자리를 떠서 다른 일을 하고 왔다. 글의 흐름이 깨졌다. 조금 전까지 무엇을 썼는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봐야 했다. 물론 네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글만 쓴다면 건강에 큰 해를 입힐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 쓰기 시작한 글을 끝맺기까지는 엉덩이를 떼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되도록. 그래야만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계속되는 리듬을 타고 글은 끝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퇴고는 그다음에 이루어지면 된다.
네 시간을 글을 쓴다는 말은 그 시간 동안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는 말은 아닐 터이다. 그만큼의 인내심과 집중하기를 요구하는 말일 터다. 글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글쓰기에 필요한 글을 읽기도 하면서, 글감을 떠올려 보기도 하면서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방금 전에 다른 일을 하면서도 글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어떤 문장 앞에 이 문장을 더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가할 문장이나 단어들이 퍼뜩 떠올랐다.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는 리듬이 깨진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다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몇 분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자. 직장 없이 놀고 있는 지금은 글을 쓸 수 있는, 써지는 혹은 써지지 않을 때라도, 어떤 시간이라도 글을 쓰자. 직장을 다니게 된다면, 그때는 또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하루도 거르지 않겠다는 각오로 책상 앞에 앉아 보자. 너무도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핑계를 대고 열심히 살지 않았다. 평생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고 했던 말들이 ‘다 거짓이었을까’ 하고 마음 흔들렸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얻기만을 바랐다. 그러니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수밖에.
글을 처음 쓰는 사람처럼 글을 쓰자. 마주하자. 사랑하자. 기도하듯 쓰자. 성심을 다해, 온 맘을 다해. 쓰자. 쓰고 쓰고 또 쓰고, 계속 쓰자. 날자, 날자, 쓰자,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