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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음 8시간전

불현듯, 하얀 눈

두려운 행복

   날이 흐리다. 구름이 많아서 해를 볼 수 없다. 흐린 날씨 탓일까, 누군가 그리워진다.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는다. 그리운 마음이 바스락거린다. 붉게 물든 잎, 푸른 잎, 노란 잎들이 땅 위에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것이다. 곧 만추가 될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모르겠다. 지금 살고 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인지, 도통 아무것도 모르겠다. 질문을 해보지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남자가 개를 산책시킨다. 개는 남자가 이끄는 대로 뛰는 듯 걸어간다. 발걸음도 가볍게 남자의 뒤를 따른다. 남자는 개를 통제할 힘을 가졌다. 언제가 할머니가 개의 목줄을 잡고 가는 걸 보았다. 할머니가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가 할머니를 산책시키는 것 같았다. 개가 앞서 가고 할머니는 개를 따라가기 위해 발을 재게 움직였다. 미처 개를 따라가지 못하는 할머니의 가뿐 숨소리가 내게 들렸다. 나는 남자처럼 개를 내가 산책시키고 있는지, 아니면 할머니처럼 개가 나를 산책시키는 것처럼 삶에 휘둘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나를 산책시키면서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소박하게 사는 것이었다. 가난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살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지 않았고, 많이 갖고자 하지 않았고,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지 않았고, 좋은 옷을 입고자 하지 않았다. 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적은 돈들은 어떡하든 마련되었다. 누가 도움을 주던지 고맙게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굶주리지 않았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말한 것처럼 일용할 양식을 그때그때 주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을 도와주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적은 돈 - 사치스럽고 사악한, 분에 넘치는, 만족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 , 일용할 양식만을 원하지 않았다. 좀 더 나은 아파트에 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목돈이 필요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가져보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억’ 단위의 돈을 가졌으면 했다.  

    

   나는 아이들 때문에 많은 돈을 원하고, 지금 사는 아파트보다 좀 더 나은, 도시에 있는 아파트에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지금은 내가 원하는 것이 되었다. 다른 어떤 것도 이제 원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아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눈을 뜨고 있을 때나, 눈을 감고 있을 때나, 괴롭거나 즐겁거나 슬플 때나, 언제 어디서나 글 쓰는 삶을 살고 싶어 했고, 살고 싶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지금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요, 내 삶의 원천일 수밖에 없음을, 슬프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내가 원하는 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아이들에게 가난으로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잠시 내려놓는다. 꼭 좋은 글을 쓰겠다는 생각, 등단을 해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 이 모든 현실에서 ‘작가’라고 불릴 수 있는 과정과 형식을 뒤로 미룬다. 세상 사람들의 눈, 세상 사람들의 잣대에서 하늘의 잣대, 하나님의 잣대, 나 스스로의 잣대를 나에게 내민다. 작가가 별 것인가, 글을 쓰는 사람은 다 작가가 아닌가. 이제 마음을 편하게 갖는다. 글로 옮김으로써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인다.      


   개가 나를 끌고 가듯 하루하루를 끌려가는 삶이 아닌, 내가 내 삶을 끌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흘러가고는 있는지를.     


   잿빛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면 좋겠다. 불현듯 하얀 눈이 보고 싶다.     



   

   해가 지고, 흐렸던 하늘에 별이 떠 있다. 어느 해,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고 기숙사로 향하면서 내게 주어진 행복이, 가슴 벅차도록 충만한 행복이 너무도 투명해서 산산조각 날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전율했었다. 그날 별들은 유난히 반짝였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   

   

   언제나 내 삶에 두려운 행복이 가득하기를! 추위에 떠는 반짝이는 별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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