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리를 듣자니 안타까운 현장을 보았거나 가슴 무거운 사연을 들었을 때처럼 입에서 '에효'하며 깊은 한숨이 나왔다.
여씨 어머니, 송 씨 아버지는 진도 송순단 씨 집 마당을 그대로 옮겨 온 남산국악당 무대의 제사상에 초대되어 후손들의 인사를 받으며 흐뭇하게 좌정하시고, 망자의 친구들까지 손님으로 초대되어 본격적인 굿판이 시작되었다.
무녀 엄마의 긴 호흡에 아들 조성재의 아쟁은 그 울림을 더 깊게 증폭시켰고, 또 한 명의 소리꾼 강민수가 치는 무징에는 끈끈이가 붙었는지 채가 '쩍' 붙었다 떨어지는 순간 미세하게 밀리는 싱코페이션 같은 느낌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을 즘 무대는 제석굿으로 넘어갔다.
'재석굿'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복락을 나눠주는 굿판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복돈을 들고 무대에 오르며 인사를 한다.
만원, 만원, 오만 원, 만원...그렇게 쌓인 복돈이 산을 이루는 가운데 가락이 진도 아리랑쪼로 넘어가며 흥을 달군다. 그사이 가인이 악사들 사이를 돌며 어깨춤을 추면서 한 사람씩 인사하고 오늘 굿판의 연주를 잘 부탁하는 의미로 연주자들에 복돈을 나눠주다오빠 조성재와 마주쳤을 땐 서로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마치 학교 갔다 돌아온 오빠를 반갑게 맞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어린 아이처럼 해맑았다.
"오늘 여기 오신 손님들, 오 층 짓고 칠 층 짓고 빌딩 지으시고, 삼천석 오천석 부자 돼 소사~"
무녀가 왼손으로 새 생명을 기원하듯 땅에 노적(쌀)을 뿌릴 때 오른손 대나무 가지와 대꽃이 낭창낭창 앞 뒤로 흔들리며 방긋방긋 웃는 부포처럼 인사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 후 액막이를 마치고 마이크를 잡은 무녀가 자기 이야기를 했다.
"이 자리는 슬픈 자리이자 좋은 자리입니다. 설움 당한 만큼 악착같이 살아 오늘이 있습니다"
그 뒤 고(매듭)를 풀며 굿 판은 '씻김굿'으로 넘어갔다. 솥을 씻고, 맷돌을 씻고, 돗자리를 씻고 광목으로 닦고 노적을 던지고... 돗자리를 펼치니 화려한 비단옷 두 벌이 보인다.
"송 씨 아버지 여씨 어머니 석가여래의 은덕으로 아버지의 벼와 어머니의 살을 빌어 제석님 전 명을 받아 탄생하였으니... 넋이로다 넋이로다 넋이라도 도와 주소사... 이승에서 못다 쓰셨으니 원통하다... 왕생극락 하소사~" 하며 자손들의 명과 복을 빌었다.
드디어 대미를 장식한 '길 닦음(길배)'에서 두 사람이 마주 잡은 광목은 길(물길)이 되고 그 위에 망자를 태운 배가 유유히 떠 있다. 건너는 강은 넓지도 깊지도 않았으나 다시 또 사람들이 십시일반 건네준 정성이 산처럼 쌓이고 쌓여 추~욱 늘어진 광목, 부모님의 사랑은 저 보다 더 넓고 깊었겠지만 "이제 가시면 어느 시절에 오시려나"하면서 무녀는 부모님의 한을 풀어 드렸고, 본인의 맺인 한도 풀었다.
공연은 송가인의 어머니 송순단 씨가 올린 소리굿이었다.
2001년 '진도씻김굿 전승교육사'로 지정되면서 활동했으니, 2012년에 데뷔했다는 송가인을 알기 전부터 나는 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송가인의 팬클럽 회원인 듯한 뒷줄 관객이 공연 중 이런 소리 하는 걸 들었다.
"어머니 연습 많이 하셨나 봐?"
그 소리는 연습 몇 번해서 완성되는 소리가 아니다. 오늘날 송가인은 평생 소리한 엄마의 진도 소리가 식임새(삭힘)를 통해 송가인에게 전해져 '남도 트로트'로 탄생한 것이다.
조 부모의 조 부모를 통해 세습무가의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삭힘...
인터미션 없이 세 시간 넘게 달렸던 공연인데, 단 일초도 딴짓하지 않았으니 나는 아무래도 말년을 진도에서 보내야 하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