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한양에서 쌈박질로 유명한 공고를 졸업하고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어 서울역 앞 대일학원 단과반을 다녔다. 돈이 없다 하니 지도원(칠판 닦는)하면 수업료 면제라 하여 새벽부터 칠판을 닦으며 수업을 들었다.
집에선 가난 때문에 뭐든 나올 게 없어 필요한 용돈은 오후에 아이템플(일일학습지)을 배달하며 스스로 벌었는데, 내가 담당한 구역은 '후암동'
당시 후암동은 빈부격차가 심한 동네여서 서울역 건너 대우빌딩 뒤부터 힐튼호텔 까지를 '양동'이라 불렀고 곧 허물어질듯한 건물들엔 두세 평짜리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복도에 곤로와 찬장을 내놓지 않으면 두 사람 눕기도 불편한 방이었는데 그것도 감지덕지 단칸으로 월세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번은 잠재고객이던 예닐곱 살 꼬마가 기다렸다는 듯 내 손을 낚아채고 집으로 가자했다. 그 나이 아이들에게 일일학습지는 놀이와 같아서 한 달 1,500원에 다른 집 아이들은 다하는 그 재밌는 걸 못하는 게 너무 속상했었나 작정하고 엄마를 졸랐던 모양이다.
신규가입은 수당이 컸다, 그래서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신나게 발걸음 했는데, 양동의 허름한 집이야 그렇다 치고 들어오라 해서 방문을 여니, 부모라는 두 분은 연세 많은 시각 장애인이었다.
가만 보니 그분들은 길 건너 서울역을 시작으로 늘 어두운 1호선 지하철 속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적선을 받는 분들이었고, 늦은 결혼 후 손녀 같은 딸을 얻어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분들이었다. 물론 가끔은 그 아이 앞세우고 적선 다니기도 했겠고,
수당이 필요했으나 너무나 측은한 그들 현실에 내가 했던 선택은 남는 학습지(무가지) 더 챙겨 매일 그냥 주고 오는 것이었다.
수당과 인연이 없던 그때 그 일은 그렇게 지났고, 이제부턴 내가 선생님이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다.
워낙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 한 때 오디오 장비에 미쳤을 때 이것저것 테스트하기 좋은 해방구는 백화점 전자제품 코너였다. 그래서 서울 도심의 백화점 오디오 매장은 자주 들리는 놀이터였고 신제품 나왔다 하면 바로 달려가 눈치껏 만져보고 감동하고 그랬었다.
그러던 어린이날이 지난 요맘때 주말, 오랬만에 을지로 롯데백화점 본점 오디오 매장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을 때 한 무리 꼬맹이들이 나 있는 쪽으로 걸어왔는데 남는 학습지를 챙겨주던 그 꼬맹이와 눈이 마주쳤다.
"시험지 아저씨다!"
"선생님~~~"
'선생님?'
'나?'
보잘것없는 재수생한테 선생님 이라니?
누가 봐도 내 행색은 선생님이 아닌데, 아이들이 반가워하는 모습에 기쁨보다 쪽팔림이 먼저 왔다.
사람들이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아무 생각 없이 광속으로 뛰었다. 그런데 내속 모르는 아이들은 얼마나 반가웠는지 나 만큼 빨리 쫓아왔다.
결국 아이들을 따돌리고 자리는 피했으나 삼십오 년 지나 되돌아보니 그럴 것까지는 없었는데 싶다, 반가움의 표현이고 감탄사였을 텐데, 아는 척해 주고 죠스바라도 하나씩 사줬었으면 하는 후회가 든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줬던 아이, 오늘은 그 아이가 떠오른다. 장애가 있었던 부모님은 건강하신지, 한때 대한민국은 나름 잘사는 나라라고 인정 받기도 했는데, 처절한 가난의 고리는 끊었는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