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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타와 회피 기동

일본인의 역사 인식

by 집사 김과장

나는 하얼빈사범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가 있었던 곳이고, 일제 최악의 만행인 ‘마루타’로 잘 알려진 731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근원적인 분노, 적개심이 넘실대는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얼빈에서 유학, 혹은 어학연수 중인 일본 학생은 꽤 많았다.

당시 학교 유학센터 외국인 학생 비율은 한국인 50%, 일본인 35%, 러시아인 10%, 기타 5% 정도였는데, 이는 하얼빈 내 대학 유학센터 대부분이 비슷했다.

일본 유학생 중에는 희한하고 재수 없는 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절하고 상냥했고 우호적이었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교류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화와 사고방식의 유사성 때문에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대단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방과 후 활동의 일환으로 ‘역사 투어’를 진행했는데, 장소가 하필이면 ‘731부대 죄증진열관’이었다.

그날은 영하 20도 아래로 수은주가 떨어진 겨울날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기념관은 스산했다.

버스에서 내려 입구로 향하는 길에 분위기가 차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시시덕거리며 서로를 놀리고, 웃고 떠들던 얼굴들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국 학생 중 누군가가 갑자기 ‘쪽바리 새끼들’이라며 증오를 표출했다.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떠올릴 때마다 분노가 치미는 역사일지언정,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이 이게 맞나 싶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는 서로 도와가며 공부하던 친구를, 땀 흘리며 같이 운동하던 친구를 갑자기 적으로 인식하는 얼굴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부추기면 당장에 패싸움이라도 날 듯한 분위기였다.

그 순간, 그곳은 분명히 이성이 마비된 듯했다.


_KKY5401.jpg 하얼빈731부대 죄증진열관


전시관 공기는 갑갑하고, 무거웠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현장에서 본 자료 사진들은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다.

체험활동을 마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득 일본 친구들 얼굴이 궁금해져 슬쩍 그들 무리를 훔쳐봤다.

그들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그 공간을 떠다녔다.

다음날 교실에서 만난 일본 친구에게 어제의 경험이 어땠는지 물었다.


“글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내가 한 일도 아니고, 예전에 일본군이 한 일이잖아?”


머리가 띵했다. 메울 수 없는 간극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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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731부대 죄증기념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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